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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4-12-15 (월) 09:4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803    
만왕의 왕의 탄생(마 1:18-25)


이 세상에서 예수(Jesus)라는 이름만큼 많이 불려지는 이름은 없을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 경우에는 더합니다. 급할 때에 도움을 청하는 경우에도 불리워 지는 이름이요, 놀랄 때에도, 기분이 나쁘거나 욕을 할 경우에도 불리워 지는 이름이 예수(Jesus) 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찬양에도 수없이 불리워 지는 이름입니다. 성경에도 무려 600번 이상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주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신 이름 "예수"를 다시금 생각해 보며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마태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1절부터 17절까지 열거하면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어진 메시아로 다윗의 자손이며, 연약한 죄인들이 그 족보에 함께 함으로 은혜의 왕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오심을 나타내었습니다. 또한 이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인간으로 오셨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하나님으로서, 신성으로 이 땅에 탄생하심을 가르쳐 줍니다. 실제로 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incarnation) 하신,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역사적인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오래 전에 예언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 7장 14절 훨씬 이전에,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 ‘후손’이라는 뜻을 넓은 의미의 ‘자손’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좁은 의미의 ‘씨(seed)’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씨는 원래 남자가 주는 것인데,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씨로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바울도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 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정혼(betrothed)하였던 다윗의 자손 요셉은 아내 마리아가 자신과 성관계도 없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유대 율법에 의하면, 정혼은 곧 결혼이나 다름이 없기에 아내, 남편으로 불렀고, 정혼한 아내가 간음한 경우는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신 22:23-24). 그러나 요셉은 믿음이 있는 의로운 사람이었기에. 마리아를 사랑하였기에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정리하고자 한 것입니다(19절). 하나님께서 신앙있는 사람을 사용하신 것을 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아무것도 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데려 오라고 합니다. 잉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임을 말하면서 마리아는 동정녀(童貞女, virgin)임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20절). 그리고는 아이를 낳거든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 이름이 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입니다(21절).
   “예수”는 구약의 “여호수아(Jehovah is salvation)”와 같은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구원한다, 고친다, 건진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며 구세주로 믿는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잘못 알고 있듯이 세상 모든 사람 누구나 다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분은 예수님 한 분입니다. 석가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로마 교황도, 공자나 맹자 그 누구도 우리의 죄를 사하시지 못합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죽음도 죄 때문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죄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길이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튼날 (세례)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우리의 죄를 사하실 분이 없으심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구속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을 감사하십시다.

둘째로, 임마누엘로 오신 분입니다(23절).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주전 730년 경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어진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본문의 마태는 이사야 7장 14절의 말씀,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의 예언을 성취시키시는 천사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의미라고 가르쳐 줍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완전한 사람이자 완전한 하나님으로 오신 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지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말입니다(마 28:20). 그래서 자신 스스로가 말씀하신 것을 지키시기 위하여 자신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지만,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왜 함께 하십니까?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로하고 돕기 위하여서 입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사탄의 무리들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하여 말입니다.
   여러분은 2000여년 전에 아기예수로 오신 만왕의 왕께서 지금도 함께 하시며, 영원토록 함께 하실 줄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시니 안심할 일이요, 즐거워할 일인 동시에 두려워하며, 또한 늘 경배해야 할 것 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로 오신 분입니다(18절).
   18절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 . . "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옛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 받은 자(Anointed One)’라는 뜻으로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의 직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대제사장으로, 온 나라를 다시리시는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눈이 먼 자들에게 빛으로, 귀가 먼 자들에게 들을 수 있게 함으로, 앉은뱅이에게는 일어남을, 문둥병자에게는 깨끗함을, 포로된 자에게는 해방을, 눌린 자에게는 자유를, 죽은 자에게는 부활을 가져 오셨습니다. 소외된 자들에게는 친구로, 고아와 과부에게는 아버지로 남편으로 오신 분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초림은 인간들에게는 축복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화가 되지요.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참으로 여러분의 그리스도(Christ), 주(Lord) 입니까?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분이 다스리도록 자신을 포기하고 사십니까? 성령의 인도따라, 성경 말씀따라 살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까?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아마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평안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천사가 하신 말씀 그대로 순종하여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해산할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아들을 낳자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24-25절). 참으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귀중한 도구로서 쓰여진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했던 성도였습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오늘 성경본문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과 달리 동정녀에게 탄생하신 것입니다.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신 까닭에 인간의 죄를 온전히 대신하여 드릴 수 있었던 희생제물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보통사람과 다름없이 남녀 성관계에서 태어나셨다면 그 분도 죄인인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신비한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인간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만 이해 가능한 일이지요. 물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에 하신 초자연적인 기적들은 그가 초자연적으로 탄생하였음을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다면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믿어집니까? 성령으로 태어나신 분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성령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믿을 수가 없는 진리입니다.
   참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되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장 높이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고 하셨습니다. 즉 여러분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라고 시인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말로만 아니고 행동으로 하면 더 큰 영광이 되지요. 반대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지 못하면, 행동으로 예수님이 주되신 것처럼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누가 여러분에게 ‘많은 사람이 그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실 수 있습니까? 정말 자신있게 ‘그분은 나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나와 늘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나의 구주로서 나를 다스리고 내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라고 말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할렐루야!’ 입니다.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입니다. 정말 만왕의 왕의 탄생, 성탄은 축하할 일입니다.
   
   예수! 그 이름은 능력의 이름입니다. 죄를 사하는 능력, 우리의 대적을 이기는 능력의 이름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구원자, 임마누엘, 그리스도의 예수! 그 분을 영원토록 찬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감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어느 분이 감동적인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오셨습니다.
   나환자만 있는 소록도에서 목회하는 K 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찾아와서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느닷없는 노인의 요청에 목사님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아니, 노인장께서는 정상인으로 보이는데 나환자들과 같이 살다니요?" 노인은 "저는 모두 열명의 자녀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 중의 한 아이가 40년전 11살때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발병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 아이를 다른 가족이나 동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로 왔겠군요" "그렇습니다." 소록도에 나환자 촌이 있다는 말만 듣고 우리 부자가 길을 떠난 건 어느 늦여름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매우 불편해서 서울을 떠나 소록도까지 오는 여정은 멀고도 힘든 길이었죠. 하루 이틀 사흘…. 더운 여름날 먼지나는 신작로를 걷고 타고 가는 도중에 우린 함께 지쳐 버리고 만 겁니다. 그러다 어느 산 속 그늘 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나는 문득 잠에 골아 떨어진 그 아이를 죽이고 싶었습니다. 바위를 들었지요. 맘에 내키진 않았지만 잠든 아이를 향해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윗돌이 빗나가고 만 거예요. 이를 악물고 다시 돌을 들었지만 차마 또다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어요. 아이를 깨워 가던 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록도에 다 왔을 때 일어났습니다. 배를 타러 몰려든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며 코가 달아난 문둥병 환자를 정면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자 아직은 멀쩡한 내 아들을 소록도에 선뜻 맡길 수가 없었습니다. 멈칫거리다가 배를 놓치고 만 나는 아들에게 "저런 모습으로 살아서 무엇하겠니? 몹쓸 운명이려니 생각하고 차라리 너하고 나하고 함께 죽는 길을 택하자" 하고, 우리는 나루터를 돌아 아무도 없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신발을 벗어두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 한발 두발 깊은 곳으로 들어가다가 거의 내 가슴높이까지 물이 깊어졌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돌아서더니 내 가슴을 떠밀며 악을 써대는 거예요 문둥이가 된 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어야 하느냐는 거지요. 형이나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판에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어떻게 살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완강한 힘으로 자기 혼자 죽을 테니 아버지는 어서 나가라고 떠미는 아들녀석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그 애를 와락 껴안고 말았습니다. 참 죽는 것도 쉽지만은 않더군요. 아들의 간곡한 호소에 소록도로 아들만 떠나 보내고 저는 돌아와 서로 잊은 채 정신 없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를 낳고... 얼마 전에 큰 아들이 시골의 땅을 다 팔아서 함께 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지요. 처음 아들네 집은 편했습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고 이불 펴 주면 드러누워 자면 그만이고. 가끔씩 먼저 죽은 마누라가 생각이 났지만 얼마 동안은 참 편했습니다. 그런데 날이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애들은 아무 말도 없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인가는 드디어 큰 아이가 큰아들만 아들이냐고요. 그날로 말없이 짐을 꾸려 둘째, 셋째, 넷째 … 를 찾아갔죠. 그런데 사정은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허탈한 심정으로 예전에 살던 시골집에 왔을 때 문득 40년 전에 헤어진 그 아이가 생각나는 겁니다. 내 손으로 죽이려고까지 했으나, 끝내는 문둥이 마을에 내팽개치고 40년을 잊고 살아왔던 아이, 다른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는 온갖 정성을 쏟아 힘겨운 대학까지 마쳐 놓았지만 내다버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아이... 한번만이라도 보고 용서를 빌고 죽겠다고 다시 또 먼 길을 떠나 오늘 그 아이를 찾아 만나보니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쉰이 넘은 데다 그 동안 겪은 병고로 인해 나보다 더 늙어 보이는... 그러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하고 맑은 내 아들이 울면서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지를 한시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40년이나 기도해 왔는데 이제서야 기도가 응답되었군요. 이제 저와 함께 살아요" 합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유도 없이 물었죠. 어째서 이 못난 애비를 그렇게 기다렸는가를... 자식이 문둥병에 걸렸다고 무정하고 내다 버린 채 한번도 찾지 않은 애비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텐데 무얼 그리 기다렸느냐고...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노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비참한 운명까지 감사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감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그때서야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힘으로 온 정성을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 없다고 내다버린 하나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 또한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겠노라고 난 다짐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내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여기 나환자 촌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애는 내가 여기 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 애와 며느리, 그리고 그 애의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바람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지금껏 내가 구경도 못했던 그 무엇이 들어있었습니다.
공들여 키운 아홉 명의 아이들에게선 한번도 발견하지 못한 사랑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 애에게 잃어버린 40년의 세월을 보상해 주어야 합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애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일 작정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를 여기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높고 큰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신 예수
       나를 위하여, 내 죄 위하여
       지극한 사랑으로 비천한 말 구유에 나신 이
       그 이름 예수!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있어도
       인간은 늘 고독하다는 것을 아시고    
       아플 때에도, 힘들 때에도, 어려울 때에도
       영원한 친구로 함께 하려고 오신 이
       잘못 갈 경우에도, 뱀의 유혹에 넘어가도
       돌아서길 기다리며 함께 하시는 이  
       그 이름 예수!

       이리 저리 방황하며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모를 때
       온유하고 자비로운 손길로 인도하시는 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역사를 주관하실 뿐 아니라  
       연약하고 작은 나를 다스리시고 주장하시는 이
       그 이름 예수!

       할렐루야!
       찬양을 받으실 이름
       감사를 받으실 이름
       영광을 받으실 이름
       그 이름 예수!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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