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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6-02-25 (목) 12:36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950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14)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 하기 위하여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창 22:1-2). 성경에는 세 가지 종류의 시험이 나옵니다. 시험(Test), 시련(Trial), 그리고 유혹(Temptation) 입니다. 이 중에서 시험과 시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요, 유혹은 사탄,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세우게 하시려고, 정금 같이 나오게 하시려고 주시는 것으로 결국은 축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주는 것은 우리를 쓰러뜨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이 오면 이것을 잘 구별하여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하여 부르실 때에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1절)라고 대답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듣고 순종하겠다는 자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하신 것을 보면,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독자 이삭은 아브라함이 엄청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75세에 아들을 주시겠다고, 그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창 15:5). 그 후 25년이 지난 다음에 90세 된 사라의 몸에서 기적같이 드디어 아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편에서 생각하자면, 하나님의 요구는 참으로 너무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 대항할 수도 있는 요구, 참 하나님답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하고 명령에 망설이거나 불복종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무 말없이 다음날 아침 일찍 독자 이삭과 두 하인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도 준비해서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 모리아 산(지금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3절). 즉각적인 순종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약 50 마일입니다. 3일 길입니다(4절). 아마 그 3일이 아브라함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자신과 싸움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어 돌아갈 수도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아가 죽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마음에서 이미 이삭은 죽은 아들로 여겼을 것입니다.
한편 부인 사라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 성경에 사라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을까요?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알렸다면, 사라와 의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저는 크게 부부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더 이삭을 사랑했을 것 같습니까? 부성애라는 말보다 모성애라는 말이 우리의 귀에 더 익숙한 이유는 아무래도 9개월 자신의 몸 안에서 키운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친다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아마 아브라함에게 욕을 했을 것입니다. 당신이나 제물로 바치라고, 아니 나를 대신 바치라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무 말도 사라에게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모리아 땅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5절). 아마 하인들과 같이 산에 올라갔으면 그들이 자기의 행동을 막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 아래에 떼어놓은 것 같습니다. 이런 행동들이 믿음의 지혜로 여겨집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모리아 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는 질문을 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7절하). 그러자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고 아브라함이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믿었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에는 이미 준비해 놓으시고 허락하실 줄을 믿고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던 믿음의 근거를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로 하였습니다. 이 전에 주신 약속의 말씀인 자기의 후손이 하늘의 뭇 별들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였기에 조금도 의심 없이, 만약 독자 이삭을 요구하시면 분명히 무슨 뜻이 있을 것이며, 아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신뢰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기도 합니다. 모리아 산(예루살렘), 번제물 어린 양, 기적으로 얻은 독자 이삭, 다시 살리심!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온 세상 죄를 위하여 바치신 것처럼,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자를 아무 불평도 없이 기꺼이 바치고 있습니다.
정확한 장소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은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얹었습니다(9절). 그런 다음 그는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그 때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 성경이 적고 있지 않지만, 사실 그 순간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손을 들고 칼로 자기 아들의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10절), 단 일초도 어긋남이 없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1-12절)!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눈을 들어보니 근처 가시나무에 뿔이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수양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자기 아들의 생명을 취하는데 사용하려던 그 칼로 아브라함은 수양을 죽여 피를 내고, 아들 대신 번제물로 제단에 놓고 하나님께 바쳤습니다(13절). 그리고는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습니다. 히브리어에 ‘이레’라는 말은 ‘준비하다, 제공하다(Provide)’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섭리(Provision) 입니다. 미리 보신다는 뜻입니다. 즉 ‘이 곳은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보시고 미리 양을 준비해 놓으신 곳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전체 이야기를 간략하게 세 문장으로 표현하면,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셨고, 2) 아들을 요구하셨고, 3)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가 허락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때때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 하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요구하십니다. 그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셨다가 허락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 본문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아브라함의 순종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초점은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는 데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위대하다면, 우리 하나님은 훨씬 더 위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없는 것을 준비시켰다가 허락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죽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신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자신의 전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아브라함이기에 자기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 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일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요구하신다면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분들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요구하실 때에는 분명히 준비해 놓으셨다가 허락해 주실 줄 믿고 순종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늘 우리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실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정말 믿을만한 분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들었을 때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하)고 하십니다. 많은 교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면 억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서 언급하였듯이 오늘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는 복음을 만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희생 제물을 제사장에게 들고 나와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사장들은 매일 서서 백성들의 희생 제물들을 잡아 피를 뿌리고, 불에 태워야 했습니다. 그 동물의 피로 그들의 죄가 잠시 덮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완벽한 희생 제물인 순전한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바쳐진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처럼 잠시 죄가 덮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고, 제거되고, 지워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대가를 일시에 다 치르셨습니다. 더 이상 동물의 피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외치신 것입니다. 구속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죄 값을 다 치렀다’, ‘제사는 끝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완수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우리 예수님에게도 인간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를 요구하실 때에는 다시 살리실 것도 아셨기에 기꺼이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완전히 지켜라’ 말씀하십니다. 2)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3) ‘좋다, 그러면 내가 대신 하겠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완전함을 요구하셨고, 우리는 그 기준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아들을 선물로 우리를 대신해서 보내셔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옷, 의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채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죽은 것을 아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에는 아무 소망이 없는 줄 아시고 천국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죽게 하신 후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아처럼 외로운 줄 아시고 하나님의 가족을 만들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부유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인 것을 아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요구하셨던 것을 우리에게 직접 주셨습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인도자가 필요한 줄 아시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주셨습니다. 목사와 지도자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한 줄 아시고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격려가 필요한 줄 아시고 교회의 형제 자매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그 뜻 안에서 허락하십니다. 믿음으로 그 품에 안기면 됩니다. 순종하면 됩니다. 그 축복을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이십니까? 할렐루야!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아브라함은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였기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 자신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갈라지지 않은 전심을 원하십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 다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면서 나아갔던 아브라함처럼 여러분 자신을 드리며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그 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미 준비해 놓고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준비된 어린 양을 기억하십시오. 그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하였으며,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라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셨다가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것은 거저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거저 용서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거저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체험하였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거저 받은 복음을 거저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는 찬양과 경배를 통하여, 교회를 섬기고, 형제 자매를 섬김으로, 아니 매일 매순간 순종함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더욱이 내가 어려울 때에 순종함으로 보답해야 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까? C. S. Lewis 는 이 진리를 아버지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에 비유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돈을 주는 것도 즐겁지만, 선물을 받으면 더 기뻐할 것입니다. 사실 모든 것 다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드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것을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우리 삶을 원하십니다. 우리 생명을 원하십니다. 이미 허락해 주신 것을 요구하시는데, 불순종한다면 그 같은 배은망덕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하며,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참된 헌신입니다. 이 마음으로 무엇에든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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