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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6-02-29 (월) 06:4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07    
모이면 기도, 흩어지면 전도(롬 10:14-21)
18세기 계몽주의 혹은 이성주의 운동 시작으로 교회들마저 그 영향을 받고, 19세기의 다윈의 진화론 등장, 20세기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주의와 자유주의, 과학지상주의, 그리고 New Age Movement 등의 영향으로 교회들은 그 본래의 목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점점 Christianity 는 쇠퇴해 갑니다. 더군다나 21세에 들어와 컴퓨터 발달, Information Technology 의 급속도 성장과 변화를 경험하면서 개인주의의 극치를 보고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자신들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마지막 발버둥을 치면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있고, 교회를 무너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 우리 교회는 영적으로 무디어지거나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교회 본연의 모습,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지난 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의 구원을 간절히 열망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인간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찾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이 노력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정말 복음을 믿는 자는 마음에 예수님을 구세주(Savior)와 주(Lord)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살리시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누구든지, 차별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풍성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물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12-13절). 죽음을 이기는 구원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영원한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나가야 하는 정거장에 불과합니다. 정말 소중한 것은 죽음 후에 있습니다. 거기서 이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되니 얼마나 부요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를텐데 믿지 않으니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14절상). 근데 들어보지도 못한 복음을, 주님을 어떻게 믿느냐 아니 전파하는 자가 없는 데 어떻게 듣겠느냐고 합니다(14절하).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야 들을 것이고, 들어야 믿을 것이고,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생기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절)고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모두다 이 좋은 소식,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도, 선지자들도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것입니다. 바울은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5절)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52:7)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 복되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보냄을 받았습니다. 다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벧전 2:9). 모든 족속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받게 하고,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마 28:19-20).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있는 곳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가까이 유다, 조금 먼 사마리아, 아니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행 1:8).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낸다고 하셨습니다(요 20:21).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하는 여러분들이 아름답다고, 복이 있다고 칭찬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16절)라고, 또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합니다(사 53:1). 좋은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는 나중에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지자들이 수없이 좋은 소식을 전했는데도, 듣지 못했다고 변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편 말씀(시 19:4)을 인용하면서,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18절하)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종들을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고, 그 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한데 어떻게 가장 먼저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못 들었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셨습니다. 3년의 공생애 사역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다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6)고 하셨습니다. 한 예로 가나안 땅의 이방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에 들려 예수님에게 구원의 손길을 청하자 예수님이 자신은 유대인들을 위함이라고 하니까, 이 여인이 자신을 개로 비유하면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원하지 않느냐고 한 사건이 있습니다(마 15:21-28). 그래서 예수님이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그 딸을 고쳐준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에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첫 우선순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며 못 들었다는 사람들에게 반박을 하니, 그들이 한 술 더 떠서 듣기는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한 말씀(신 32:21)을 인용하여,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이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19절)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미련한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니 그들이 시기하며 화를 내더라는 말입니다. 아니 어떻게 이방인이 알아듣는 말을 하나님을 알고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 그들이 모를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한 내용을 말씀(사 65:1)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20절) 합니다. 하나님을 배역한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니 그들이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가 구하지도 않았던 자들, 물어보지도 않던 자들이 돌이키고 하나님을 찾더라는 말씀입니다. 즉 이방인들도 복음을 깨닫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깨닫지를 못한다니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계속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손을 벌렸다고 합니다(21절; 사 65:2). 지금도 복음으로 초청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복음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의로 말입니다. 건성으로 말입니다. 아니면 게을러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의나 노력으로,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을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믿지 못해서 선물을 받지 않고서는 왜 나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느냐고 하면 되겠습니까? 아니 믿음으로 선물을 받고서는 그 선물이 내 노력, 내 공로라고 해서 되겠습니까? 복음을 듣고, 알고 있으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책임은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복음을 전해주지 않아서 듣지를 못하여 믿지 않고 죽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듣지를 못해서 믿지 않았는데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확한, 명쾌한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믿음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요 3:3)고 가르치고 있는가 하며, 또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들 안에 보이셨다고 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롬 1:19). 나중에 주님 만나면 물어보아야 할 질문입니다. 하나님 만이 아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곧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초기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의 글을 펴서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사 61:1)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Christians’(Christ-followers)이 마땅히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습니다. 복음을 기다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사탄, 마귀의 포로가 된 자들이 많습니다. 자유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영적인 소경들이 많습니다. 그 눈을 뜨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눌려 있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 짐을 덜어주어야 합니다. 지금 주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고후 6:2).
그러므로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탄이 힘을 잃고, 사탄에게 얽매였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전도는 은사가 있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해야 합니다. 몇 주일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도에 있습니다. 모든 교인이 전도회에 속해 있는 것은 함께 전도하자는 취지에서 조직을 만든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과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교제를 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를 목적으로 말입니다. 대화를 나누시면서 늘 기회를 보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좋은 소식에 대하여 말하십시오.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소에 여러분에게서 나타나는 믿는 자로서의 고상한 인격을 보고 있던 사람이라면, 여러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감동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 전하지 않으면, 그래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환자가 의사를 찾아 왔는데도 진단하지 않고, 병을 나을 수 있는 약을 주지 않거나 수술을 해 주지 않는다면 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 안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거하십니다. 작은 예수인 것입니다. 의원이신 예수님이 고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만 치료 받아 구원 받고, 병원에서 나은 사람들끼리만 교제하고 재미있게 지내겠다는 생각은 주님의 마음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병원 간판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 환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지금도 우리를 사용하여 구원하실 잃어버린 한 영혼에 가 있습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주님에게로 인도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노력을 하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을 믿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한 사람도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 외에는 사람의 영을 사로잡고 있는 사탄, 마귀의 역사를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막 9:29). 기도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잠시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는 정말 오랫동안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사탄, 마귀는 자신에게 속한 한 영혼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이 나라가, 이 사회가 회복이 되려면 교회가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종교개혁시대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모이면 힘써 기도했고, 흩어지면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에는 급속도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론에서 언급한 모든 인본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영향으로 더욱 쇠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모슬렘은 놀랄 정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풍조를 거스려 신본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 말씀 중심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본연의 모습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면 전도를 위한 기도에 열심이고, 흩어지면 전도에 열심인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입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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