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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09-16 (월) 11:3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29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눅 6:1-11)


사람의 굳어진 생각을, 신념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는다면 서로 다른 생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거나,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오해나 착각으로 서로 잘못된 기대를 하다가 실망으로, 분노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독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죄 사함을 받아 구원, 영생을 얻은 다음 무엇을, 어떻게? 구원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전부는 아닐텐데 말입니다.
누가복음 6장의 사건들은 예수님 공생애 사역의 큰 전환점을 이루는데,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기 전까지 그 백성들에게 거절당하며 저주을 받습니다. 직접 주님을 비난하며, 대적합니다. 그 동안의 비난과 무관심이 점점 진노와 견책(rebuke)으로 바뀌며 그들에게 심하게 핍박을 받습니다.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의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입니다. 1절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대 율법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지키는 전통적 방법을 어기심으로 그들의 신경을 건드리시는 모습입니다. 원래 안식일의 기본 뜻은 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3하)는 창조 원리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이 날을 기억하고 안식하도록 십계명 가운데 제 4계명으로 명하셨습니다(출 20:9-11). 사실 처음 십계명을 받을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은 올바른 영으로 안식일을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백 년을 걸쳐 오면서 바리새인들이, 그 중 특히 랍비들이 여러 규례를 만들어서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 오히려 율법을 거스리는 전통(유전)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흘러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 오히려 위험한 날로,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유대 역사학자인 Josephus 에 의하면 안식일에 전쟁도 못하게 함으로 그리스의 Antiocus Epiphanes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와도 방어도 하지 않고 패하였으며, 나중에 로마의 Pompey 장군도 안식일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쉽게 빼앗기고 말았다고 합니다. 또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1000야드(3000ft) 이상 걸으면 안식일을 범하는 죄라고 규정하고, 안식일에 바느질이나 옷을 세탁하는 것도 죄며, 목욕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물이 바깥으로 흘러 그 물을 닦는 것도 일하는 것으로 죄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의 규례를 정하여 안식일을 범하는 죄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중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은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의 율법에서 금한 안식일에 밀밭을 갈거나 열매를 거두는 일을 한 것이(출 34:21) 아니라, 단순히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신 23:25)고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시장 끼를 때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손으로 이삭을 딴 것도 탈곡한 것이어서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를 따를 때에 모든 것을 다 버렸기에 그들에게 정식 수입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족이나 믿는 자들이 종종 주는 선물로 먹는 것을 해결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배고픈 것을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2절) 라고 고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전통(유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이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이름 하에 그 근거가 있다고 하면서 합리화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올바로 연구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람이 만든 규례를 가지고 정죄하는 것이 죄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6) 하고 꾸짖기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잘못된 지적에 대하여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3절이하에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들을 세 가지로 교훈하십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면 십계명 가운데 다른 9가지 계명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명하는 것입니다. 처음 4계명은 경외함과 신실함과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라는 명령이며, 나머지 6계명은 순전함과 성실함으로, 이타적으로 내 몸같이 이웃들을 사랑하되 그들의 권리와 소유, 복지(well-being)를 존중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사랑이나 이웃 사랑은 전혀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사랑도 없고, 생명도 없는 전통에 얽매어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규례들을 지키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안식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복지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계명의 참된 의미를 말씀해주십니다.

첫째,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행동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3-4절)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다윗을 거론한 이유는 그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이나 선지자들보다 그 어떤 왕들보다 더 위대한 영웅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신지 바리새인들은 알고 있습니다(삼상 21:1-6). 질투와 복수심에 가득찬 사울 왕을 피하여 다윗이 그 부하들과 함께 기브아 남쪽으로 피하여 성막이 있는 놉에 와서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먹을 것을 요청합니다. 그 때 제사장 만이 먹을 수 있는 구별된 떡, 진설병을 줍니다. 그것 외에는 성막에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행위를 죄로 보지 않으시고 아히멜렉이나 다윗을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우기 위하여 예식법을 어긴 것을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운 율법도 그의 백성들의 생명을 위하여 지키지 못한 것을 용납하시는데, 하물며 목적 없이 어리석게 만들어 놓은 수 많은 규례들을, 전통을 어기는 사랑하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 다른 방법이 없어서 밀밭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둘째, 안식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에서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 12:5-6)고 합니다. 이미 바리새인들이 알고 있는 율법 내용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에 쉬지 않고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는 그들의 전통적 규례에서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당시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희생제사를 드리는 일 등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 주일에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다른 모든 주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주일을 범한다고 하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규례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놀라 엄청 충격을 받는, 자신을 가리켜 성전보다 더 큰 자, 위대한 자임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하니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안식일 자체를 폐지하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5절에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직접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셋째, 안식일이 자비를 베푸는 일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5절 말씀 전에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7-8)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세번째 교훈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절대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일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바리새인들도 잘 아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호 6:6상) 하신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마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여기 제사라 함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부차적이고 일시적이었던 모세 율법에서 말하는 모든 예식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의 제사도 포함됩니다.
이 안식일 제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완성을 기억하게 하며 구원의 소망을 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전히 안식함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안식일의 규례를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인애, 자비를 베푸는 것과 바꿀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애, 자비를 위하여 율법을 넘어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율법을 범하여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믿음으로 돌아서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닙니까? 무죄한 자를 정죄하는 것은 곧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전통적 규례에 대한 헌신 때문에 자비 베풀기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자비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위가 예수님 스스로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선포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은 할 말을 잃고 맙니다. 그들 앞에서 분명히 자신이 안식일보다, 성전보다 더 큰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전도, 안식일도 그를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위대할 수 없듯이, 자신이 하나님이기에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다른 날보다 더욱 그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누구보다도 주님 만을 위하여 그를 예배하고, 찬양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행 20:7, 고전 16:2) 오늘까지 이단을 제외한 개신교회는 안식 후 첫날, 주일을 특별한 날로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신 말씀의 실례를 6-10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일주일이 지난 그 다음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보니 손 마른 사람, 즉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이유를 찾기 위하여 안식일에 그 병을 고치는가 살펴봅니다(7절). 그 때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8-9절)고 묻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 정답은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10절)고 누가는 증거합니다. 또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또 다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그러자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11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분기가 가득하다’라는 헬라어 원어는 ‘비이성적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차다’ 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양심에 화인을 맞은 지옥 갈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율법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아무리 옳게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고, 기적을 보여주어도 그들의 마음과 생각은 바뀌지를 않습니다. 진리를 용납하기를 거부합니다. 도리어 더 악해집니다.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3:19). 그들의 전통(유전)을, 그들의 행위를 믿고 신뢰할 뿐 자신들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신앙생활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없는지요? 오해하거나 착각하는 것은 없는지요? 유대종교 지도자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나름대로 열심을 내지만 전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요?
율법이 아닌 율법주의(legalism)는 은혜의 적입니다. 이미 살펴본 십계명을 보더라도 심지어 모세의 율법조차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갈 3:24).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율법이 구원의 그림자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례, 전통은 영적으로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으로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5)라고 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3-14)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 자비로 사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기에 우리의 삶에서 그런 인애와 자비, 긍휼이 나타나야 합니다.
주중의 모든 일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특히 주일에는 더욱 신경을 써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행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지 온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교제하면서 쉽으로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비처럼 자유롭게, 그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고, 지난 주일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기에 섬기고 봉사하는 주일입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데에 힘쓰는 날입니다. 나를 위한 날이 아니라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날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위한 날입니다. 깨닫고 실천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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