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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10-21 (월) 06:5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48    
복 있는 자 (2) (눅 6:21, 25)


복음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 라든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 등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도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들입니다. “우는 자가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21절하)라고 하였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울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고난과 고통이 없어야, 슬픔이 없어야 행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하십니다. 아니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25절하)고 하시면서 지금 웃는 자가 오히려 나중에 화가 있다고 하십니다. 웃음이 나쁘다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는 자가 복이 있다’ 라고 하실 때에 정확한 뜻이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이기에 복이 되며, 또 어떻게 하면 이런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 세상 살면서 분명히 슬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슬픔은 정상적이며 당연하지만, 어떤 슬픔은 비정상적이며 불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개인적인 꿈이나 악한 계획이나 정욕이 채워지지 않아서 슬퍼함이나, 애증으로 인한 슬픔은 하나님께서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정상적이며 지극히 당연한 슬픔이 있습니다. 이런 고통으로 말미암은 슬픔의 눈물은 오히려 종종 우리를 치유하며 회복케 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잃고 슬퍼함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였기에 이 땅에서의 이별을 슬퍼한 것입니다(창 23:2). 또한 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가운데 외로움을 느끼며 “내 영혼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2-3) 하는 슬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주께 도움을 청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슬픔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께서 위로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울며 애통함은 이러한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슬픔, 경건한 애통(godly mourning)을 말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근심(슬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0-11)는 말씀을 뜻합니다. 우리들에게 영적 생명과 성숙함을 가져다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애통함, 슬픔입니다. 죄에 대한 애통함이 회개에 이르게 하듯이, 거룩한 슬픔은 늘 죄와 관련된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지난 번에 살펴본 심령이 가난한 자(20절)는 거룩한 애통함이 있는 자입니다. 욥은 당대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을 통하여 그 위대하심에 비추어본 자신의 무가치함, 무한하신 지혜 앞에 비추어본 자신의 유한하고 연약함을 통하여 마침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거룩한 슬픔의 자리에 이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에, 그 애통이나 슬픔 자체가 복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애통함에 응답하심으로 용서함을 체험하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죄에 대한 거룩한 통회함은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오고, 그 용서가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 4:8-9) 하신 말씀입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계속 자신의 죄성을 인하여 마음을 찢고 애통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성숙해져 갈수록 더욱 죄에 대하여 깊은 슬픔과 근심으로 주께 나아가 그의 사랑과 자비를 의지합니다. 성자(saint)란 얼마나 죄짓지 않고 의롭게, 거룩하게 사는 사람 이라기 보다는 얼마나 자주 자신의 죄에 대하여 애통함이 있느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회개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할 때에 현재 시제를 사용하였습니다. 즉 계속 반복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한번 회개한 죄에 대하여 자꾸 반복하여 회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늘 자신에게 또 다른 죄가 없는가 생각하며 말씀 속에 새롭게 드러나는 죄에 대하여 애통함을 말합니다. 그렇게 우는 자가 나중에 웃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1절하).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마 5:4).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죄에 대하여 진실한 애통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그러한 애통함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며여 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1) 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따라 죄 짓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2) 절망감입니다. 이유는 절망은 하나님에 대한 포기요, 주께서 구원해 주시며 도와주실 것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3) 자신을 속이며 가장하는 것입니다. 죄를 숨기며, 애통할 것이 없다고 가장하는 것입니다. 암을 가지고 있어서 수술을 하거나 큰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감기 정도로 여기며 약국에서 약을 사먹는 정도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면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셔야 했던 것임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가 나쁘지만 그토록 애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4) 미루는 것입니다. 나중에 회개하고 애통해 하자는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험합니까? 질병은 일찍 처리하면 처리할수록 본인에게 위로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장애를 넘어서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지신 위대한 희생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죄를 위하여 그 큰 고통과 수욕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은혜가 내 차가운 마음을, 강퍅한 마음을 녹이거나 깨뜨릴 수 없다면, 어쩌면 나는 영원히 회개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안식과 평안,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주의 이름을 더럽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우리의 죄에 대한 거룩한 근심, 깊은 애통함을 위하여 상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팔복 가운데 두 번째 복은 거룩한 야망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를 것임이요”(21절상)에서 주린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뜻합니다(마 5:6).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이 거룩한 야망은 보통 사람들의 야망, 즉 자신의 정욕을 채우며,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추구할 때에 비로소 배부름이, 참된 행복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된 행복을 줄 수 없는 잘못된 욕망들을 찾고 있습니다.
왜 의를 추구하는 영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이 필요합니까? 본문에 예수님께서 ‘주리다(hunger)’ 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실 배고픔을 뜻할 때 사용합니다. 즉 우리의 육체는 물과 음식이 꼭 필요하듯이, 영적인 삶에서 의를 추구함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 기근에 빠진 사람이, 아니 이미 죽은 바 다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육신적으로 배고프고 갈증이 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하는데, 영적으로 의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특징입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육체적 욕망을 채우면서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상) 라고 물으십니다. 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고 하였습니다.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은 탕자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좋은 것들로 –자연, 건강, 자유, 소유물, 기회, 지식과 지혜 등–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쾌락, 권력, 명예, 인기 등에 다 낭비하고 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함은 자신을 찾는(self-seeking)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요, 애통함은 자신의 만족(self-satisfaction)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령이 가난하여 지고, 죄에 대한 애통함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목마름과 굶주림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주리다’는 뜻을 여러분은 한 끼 혹은 두 끼를 거를 때 체험하는 굶주림 정도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본문에 말씀하시는 주림은 그 강도가 훨씬 더합니다. 아마 일주일 정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굶주림 상태에서 먹을 것을 찾는 강한 열망을 말합니다. 또한 현재 시제로 사용하고 있기에 계속되는 갈망을 뜻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이제(now)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께 나아오는 자들은 의에 대한 주림과 갈증으로 나아옵니다. 이미 주 안에 있는 자들은 계속 의를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라고 했습니다. 어느 청교도는 “주리는(be hungry)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려는 것에 극심한 굶주림(be starving)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탕자가 그냥 굶주릴 때에는 돼지의 쥐엄 열매라도 먹었지만, 더 기근에 허덕일 때에는 아버지께로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의를 추구한 그 결과는 배부름, 만족입니다. 이 ‘배부름’이라는 단어(corta,zw)는 동물에게 먹이를 줄 때에 풍성하게 주어서 더 이상 원하지 않을 때까지 먹일 때에 사용한 단어입니다. 완전히 만족함을 느낄 때까지 먹도록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완전한 만족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미래수동형으로 쓰였기에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만족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계속 의를 갈급하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완전한 만족을 주신다고 하였으니 무언가 앞 뒤가 맞지 않지요.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맛있는 것을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배부르게 먹고 나더라도 그 맛을 알게 되기에 잠시 후에 그것을 다시 찾아 먹게 되고 점점 먹는 양을 늘려가거나 먹는 횟수를 늘여 갑니다. 한번 만족감을 느낀 후에 더 원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의를 진정으로 갈급하며 목말라 하는 사람은 그 만족함에 맛을 보고 더 원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찾고 추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만족케 하여 주심이 시편 전체에 흐르는 주제입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시 107:9),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하였고,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하였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세월이 지나갈수록 세상은 점점 죄에 대하여 무디어져 갑니다. 성도들 마저 그 영향을 받아 죄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오히려 죄를 농담 삼아 즐기고는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웃음이 필요하고, 우리에게 좋은 것 임을 아십니다(잠 17:22). 그러나 죄를 즐겨 하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에게 웃음은 독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죄에 대하여 거룩한 슬픔을 가지고, 깊은 애통함이 있습니까? 최근에 언제 그러한 애통함으로 진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 무디어져서 이미 그런 눈물은 없어진 지 오래되지는 않았습니까? 자신이 지은 어떤 작은 죄라도 진정 통회함으로, 눈물을 흘리며,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주를 생각하며 영혼 깊은 곳에서의 참회로 주께서 주시는 위로를 체험하고 사십니까?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십니까? 아님 육체의 욕망을 채우며 배부르다고 하십니까? 앞으로 주릴 때 채우지 못할 날이 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25절상)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복 있는 자인지 알 수 있는 몇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1) 자신의 의에 대한 불만족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처럼 자기의 의에 대하여 만족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영적 체험이 많은 자라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고 말하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2) 일시적으로 육신을 즐겁게 하는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함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로 그 영혼이 만족을 얻지 못하는 자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입니다.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기본적인 양식인 말씀입니다.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에게 먹어 달라고 사정할 필요가 없지요. 예레미야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찾으면 찾을수록 말씀에 대한 갈망이 더합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까요(요 1:1). 4)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한 즐거움입니다. 그 의를 추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일 안에서 만족과 성취감을 얻습니다. 비록 그것들이 때때로 고난과 고통을 준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무리 작은 하나님의 의라도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무엇보다도, 아니 세상이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의를 추구하는 자들은 주님과 돈을 함께 찾지 않으며, 주님과 이기적인 욕심을 함께 찾지 않으며, 주님과 명예, 권력, 인기 등을 함께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주님 한 분을 원하며,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오직 주님을 통하여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사랑과 지혜를 원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정도로 부르짖느냐 하면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 119:20)고 할 정도이며, 또한 고백하기를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사 26:9)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령이 가난하여지고,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하나님의 의를 그토록 갈급하며 목말라 하십니까? 참으로 행복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혼의 만족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하여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참된 양식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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