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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10-28 (월) 07:2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68    
복 있는 자 (3) (눅 6:22-23, 26)


마태복음의 팔복과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에 나타난 마지막 복은 보다 더 역설적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버림을 받으며, 악한 자들처럼 욕을 먹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행복합니까? 어떻게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의를 위하여 핍박(逼迫, persecution)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입니까(마 5:10-12)?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는 희생하는 삶이요, 마음이 온유하며 겸손하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청결하기에, 의를 추구하며, 화평을 추구하기에 비록 세상에서 어떤 핍박을 받더라도 그러한 성도의 덕목들이, 주님을 닮은 성품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참 성도만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데, 이 세상에서는 종종 그 하나님 나라 복들에 대한 대가를 치른다는 말이지요. 어떠한 복인지 자세히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나온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있는 세 가지의 덕,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20-21절), 마태복음에서 더한 네 가지의 덕, 곧 온유하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케 하려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핍박을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에 그렇습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22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핍박들을 열거하면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사탄과 대적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기에 세상은 그리스도에게 하였던 것과 똑 같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은 신실한 성도에게 우연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고도 확실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면서 격려하기를 “누구든지 이 여러 환란(핍박)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란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데살전 3:3-4)고 하였습니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고난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종류의 핍박도 전혀 받지 않았다면, 지금도 받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지, 진짜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핍박을 일부러 찾아 다니면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오는 어떤 고통이든지 참고 견딜 각오는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핍박을 피하거나 고통을 덜 받고자 하는 것은 쉽습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 손잡으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신실하지 못한 모습을 가볍게 대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 9:26) 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대하시기를 부끄러워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주를 위해 고통을 기꺼이 받는 다는 말씀입니다.

이 22절을 마태복음에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핍박이라는 단어의 뜻은 ‘쫓아낸다, 혹은 몰아낸다’로, 기본 의미는 육체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복들은 우리의 속 사람의 덕, 성품에 관계된 덕이었는데, 마지막의 복은 외적인 덕을 가리킵니다. 주님을 위하여 당하는 육신적 고통, 핍박을 말합니다. 그것을 잘 견디어 낸다는 말입니다. 주님 스스로도 가시 면류관과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창에 찔려 피 흘리시면서도 잘 견디어 내셨듯이, 우리도 주를 위하여 어떤 육신적인 고통을 잘 견디어 내면 참으로 복 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성도를 미워하고 멀리하며 욕을 한다고 합니다. ‘욕한다’ 의 단어는, 말 그대로 ‘모욕하다(insult)’라는 뜻인데, 입으로 면전에서 못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의 앞에 끌려 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혹은 손바닥으로 치고는 모욕하기를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 26:68)고 하였습니다. 또한 말로 우리의 면전에서 모욕 주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등 뒤에서 악한 말로 비방하기도 합니다. 주님을 고소하던 자들은 주님을 가리켜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며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 라고 비방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향해 그런 악한 말들을 했는데 하물며 죄인된 우리들에게야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면전에서 욕하는 것보다 등 뒤에서 악한 말로 비방하는 것은 더욱 참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을 증명하려고 나서기도 전에 이미 악한 말들이 퍼져 버리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그러한 말에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럴 때에 우리가 복이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교회(성도)가 세상 영화를 누리려고 하면 안됩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많이 얻어 세상적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성도)는 다만 세상 것들을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한 목적적 수단으로서의 세상 일과 명예입니다. 세상(사탄)이 교회(성도)를 좋아하면 그 교회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 이 세상(사탄)은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6절)고 하였습니다. 왜 모든 사람이 우리를 칭찬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을까요? 양 다리를 걸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탄 마귀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은 진짜 성도가 아닙니다. 사탄 마귀의 조종을 받았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잘못 살고 있는데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온갖 죄를 짓고 사는데도 괜찮다 하면서 칭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줏대가 없는 것입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주의 하셔야 합니다. 아니 진짜 성도라면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약 1:8).

사실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의 주제는 ‘의(righteousness)’에 있습니다. 처음 두 덕목(심령이 가난함과 애통함)은 우리 자신 속의 불의함을 바라 보라고 함이요, 그 다음 다섯 덕목(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이 청결함, 화평케 함)은 의를 추구하고 반영하는 삶을 말함이요, 마지막은 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말함입니다. 분명한 것은 복 있는 자는 믿음이 있는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은 자로서 그의를 추구하고 삽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같은 내용을 “그러나 너희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4-17)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로 인한 고난의 특권은 주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것으로 복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장인 4장 12-14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것은 이 세상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 15:18-20)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복의 복’입니다. 그래서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23절)고 하였습니다. 어떤 상입니까? 현재와 미래, 영원한 곳에서 받을 축복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잠시 핍박과 고난을 받는 것 같으나 결국 축복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의 경우에도, 다니엘의 경우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우리 옛 믿음의 선조들의 삶도 증거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도가 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복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에는 저 하나님 나라에서 상이 훨씬 더 크겠지요.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는 주님과 동행하는 안위와 평강, 담대함이 상으로 주어집니다.
또한 저 영원한 나라에서도 상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면서 이 땅에서 주를 위하여 고생하며 고난 받은 것들을 대신하는 큰 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우리들의 모든 소유와 자유와 안락함, 육신적인 만족을 주는 모든 것들을 다 빼앗아 간대도 영원한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뛰놀라’고 본문이 말합니다. 명령형입니다. 반드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선 하늘 나라에서의 상이 크니까, 그리고 앞서간 선지자들이 그러한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그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6-38)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얼마든지 핍박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니 주님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구원의 감격이 오늘도 살아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여러분이 과거에 마음으로 결정한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 결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참 마음으로 드렸던 것이라면 현재 주님을 위하여, 의를 위하여 드려지는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도무지 모를 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마 7:21-23).
이 세상(사탄)은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들을, 성도들을 절대로 환영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삽니까? 의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고 사십니까? 아니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사십니까? 모든 자유가 있고, 너무나 먹을 것이 풍성한 미국에 사시기에 의를 위하여 사는 데에 별로 어려움을 못 느끼십니까? 아무런 핍박이, 고난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그렇지 않고 우리 주님 때문에, 성경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 사는 것 때문에 이 세상이 핍박합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이 힘들게 합니까? 교회를 섬기며, 이웃을 섬기며,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며 애쓰시는 가운데 찾아오는 고난과 환란이 있습니까? 옆에서 누가 미워하고 멀리하고 모욕합니까? 실제로 육체에 고통이 있습니까? 아니 등 뒤에서 모함하고 비방하며 악한 말을 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 들려옵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확실히 하나님 나라 백성이요, 주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니 앞으로 남은 삶에도, 저 영원한 세상에서도 주께서 주실 상이 엄청나게 큰 것 임을 믿고 소망하십시오. 고난, 핍박을 받는 것도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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