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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9-11-04 (월) 11:4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31    
성도의 사랑은 (눅 6:27-36)


참된 성도의 표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 겸손, 기도, 말씀을 사모함 등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표시는 사랑입니다. 성도들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기에 성령을 따라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에게 나타나는 열매가 하나님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고, 사탄 마귀가 주장하는 세상 나라의 복과 큰 차이가 있음을 말하시면서 그것들은 오히려 앞으로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눅 6:20-26). 그런 저주와 달리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27절) 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듣는 자’는 바로 참된 성도를 가리킵니다. 성경에 종종 ‘귀 있는 자는 들을지니’라고 표현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성도 말입니다. 그러면서 성도가 실천해야 할 아가페 사랑,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행동 5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첫째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원수(enemy)’는 대적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 정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원수일진대, 나를 미워하는 자인데 사랑하라고 합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주고 고통을 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내가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선하게 대하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인간의 본성은 원수에게는 복수를 해야 하고, 미워하는 자를 같이 미워하거나 상대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원수조차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데도 잘해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고 하였습니다. 원수가 배 고파하고 목말라 하면 고소하게 생각하며 좋아하지 말고 그가 깜짝 놀라게, 감격하도록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가 잘되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머리에 숯불을 놓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머리에 숯불을 놓으면 얼굴이 얼마나 뜨겁겠습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원수가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이 그로 부끄럽게 하여 다시는 대적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아니 마음에 감동을 받아 회개할 것입니다. 양심이 있다면 말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오히려 축복하라고 합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28절상) 하셨습니다. 여기 ‘축복하다’는 단어는 ‘좋게 말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서 나온 말이 장례식에서 고인을 기리며 하는 조사(eulogy)입니다. 그냥 세상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나쁘게 깎아 내리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좋은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의미에서 축복한다는 어떤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좋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을 저주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심판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조차 하나님에게 좋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축복하라고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한 백성으로 부르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복을 유업으로 주신다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우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28절하)고 하셨습니다. 여기 ‘모욕하다(mistreat)’는 단어는 22절의 ‘욕하다(insult)’ 라는 단어와 다릅니다. 우리를 잘못 대하는, 학대하는, 혹은 차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의 본성을 따르면 모욕하는 자에게 그대로 모욕하기 원합니다. 정의를 원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기 원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이 말씀을 할 때에는 내가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그렇게 보상하라는 뜻입니다(출 21:24).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은, 복수(revenge)는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란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신 32:35)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롬 12:19)고 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소서”(시 94:1)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기되,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넷째는, 우리를 무례하게 공격하는 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라고 합니다. 우리 것을 빼앗는 자들에게 그냥 주라고 합니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은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29-30절) 하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기본적인 인간 대우를 받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묵살할 때에는 참지를 못합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뺨을 맞는다는 것은 아주 수치를, 모욕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지요. 어떤 실수를 범했는지 몰라도 뺨을 맞는다는 것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당시 노예들에게도 뺨에 손을 대는 것을 지극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 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갈보리 산으로 십자가 형틀에 매어 달리기 위해서 오르실 때에도 많은 모욕과 멸시 천대를 받으셨지만 묵묵히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감당하셨던 주님이셨습니다. 약하셔서 당하셨던 것이 아니지요. 이 뺨을 때린 사람에게 저 뺨까지 돌려대는 것이 약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기와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때린 사람이 당황하게 되지요. 정말 누군가가 우리의 인격을 모독하며 공격한다 할지라도 묵묵히 다른 편까지 내놓는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그 사람을 얻게 됩니다. 사실 폭력은 속마음이 유약한 사람이 사용합니다. 오히려 속마음이 강한 사람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지요. 속이 상하는 것보다는 겉이 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격을 모독할 때도 복수하지 않고 용서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네 겉옷을 빼앗은 자에게 속옷도 원하면 주라”고 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고소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떤 사람이 법정까지 우리를 나오게 하여 자기가 피해를 보았다고 고소하면 속옷뿐 아니라 겉옷까지도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배상할 돈이 없으면 옷이라도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가난하여 겉옷은 하나, 속옷은 둘 정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보장인 겉옷을 원하는 그에게 속옷까지 주게 되면 받는 사람은 감동할 것입니다. 다시 맞고소하여 감정적으로 재판을 이기려고 하기보다 내가 잘못이 없더라도 더 나아가 사랑을 표현하면 그 사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신자들 사이에서는 송사가 있어서는 안됩니다(고전 6:1-8). 비록 내가 잘못하지 않고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손해를 볼지언정 고소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내 것을 원하면 관대하게 주고 돌려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초점은 이 세상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해주기 원하는 대로 대하라고 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31절)고 하셨습니다. 소위 말하는 ‘황금률(Golden Rule)’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자녀들에게서 가장 잘 반영이 되는 때가 그들이 자기가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할 때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이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도덕적인 것들을 행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두번 그럴듯한 선행을 보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지속적인 사랑을 베푸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자원이, 성령이 없기에 그 선행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며 대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의 요약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두 번째로 큰 계명,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을 다른 말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는데, 특별히 사도 바울이 지적하였듯이 믿음 안에서의 다른 형제들에게 대하여 입니다(갈 6:10). 다른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하기를 원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우리가 생각하기를 반드시, 적어도 이만큼 하면 되지 하면서 그들을 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종교와의 큰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황금률을 가르칩니다. 유대주의자로서 큰 학파의 시조였던 Hillel 이라는 사람은 ‘네 자신에게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에도 ‘네게 어떤 일이 행하여지길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일을 행하지 말라’고 하는 등 그들의 강조점은 모두가 부정적입니다. 물론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만 하나님의 기준에는 아주 먼 교훈들입니다. 아마 죄인들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겠지요. 사랑의 표현이 아니고, 자신의 의, 자신의 웰빙에 초점을 두니, 그 동기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니 당연합니다. 자신들을, 자존심들을 지키기 위한, 어떤 두려움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는 동떨어진 교훈들입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자아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Narcissist 들입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에 도취되어 그의 온 생애를 그 연못가에서 보냈다는 이야기처럼 자기 자신들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죄는 자기 자신이 그 자아에 얽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사는 이기적인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을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32-34절)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예수님처럼 상대방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이 선대하는 것입니다.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빌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오직 내주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고 하였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 만이, 깊이 깨달은 사람 만이 그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35-36절)고 하셨습니다. 또다시 반복합니다. 성도로서 원수에게조차,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살면, 베풀고 살면 우리에게 큰 상이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상은 23절에서 말하는 하늘의 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누리는 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놀라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그렇게 인자를, 긍휼을 베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잘못 대하며 모욕하는 자들이 잘되기 위하여 기도하고, 무례하게 공격하는 자들에게 친절하게, 빼앗는 것이 있으면 주고 더 필요하면 대가를 바라지 말고 주라고 합니다.
어쩌면 많은 분들은 도저히 불가능한 말씀을 한다고, 나는 그렇게 못한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우선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동, 감격이 우리 마음에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면 성령에게 항복하면서 내가 죽을 수 있습니다. Selfless! 내 자아(ego)를, 자존심(pride)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내 안의 성령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은혜를 받았는데 정말 자격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참된 성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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