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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7-19 (일) 08:0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46    
주님을 따라가려면 (눅 9:51-62)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 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라가려면 여러 장애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계속 주님을 따라가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장애들을 극복하려면 그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고 실제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동안 제자들에게 언급한, 예언한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부활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핵심이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51절부터 19장 27절까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입성하는 종려주일 전까지 제자들과 동행하며 많은 비유의 말씀들로 교훈하십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51절) 하였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시는 것이지만, 그 길은 험난한 골고다 십자가를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배신과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로마관원들의 핍박과 빌라도 앞에서의 재판을 거쳐,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습니다.
우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가려면 사마리아를 거쳐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 멀리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상종하지 않는 인종적 편견이, 서로 적대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니라”(52-53절)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인종적 편견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만약 메시아라면 사마리아들의 전통에 따라 그들의 성전이 있는 그리심산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참고- 요 4:20, 삿 9:7).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우뢰의 아들’(막 3:17)이라는 별명을 가진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절)라고 합니다. 아직도 훈련이 덜된 그들이 기질을 나타냅니다. 옛날 엘리야 선지자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북왕국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왕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잡으려고 보낸 50명을 불살랐던 사건(왕하 1장)을 기억하며, 얼마 전에 변화산에서 그 엘리야를 만났었고, 주님이 그만큼 능력 있을 테니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심판할 때가 아니기에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55-56절)고 하였습니다. 아직 제자들은 사역을 위한 능력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적대감이 있는 사마리아인들조차 사랑해야 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사실 얼마 전에 제자들을 유대 땅에 단기선교를 보낼 때에도 만약 사람들이 그들을 영접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른 동네로 가라고 가르치셨었습니다(요 9:5).

다른 길로 가는 도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어디로 가시든지 자신은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57절).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이 구약성경 학자인 서기관이라고 하였습니다(마 8:19). 그는 주님에게 무슨 요청이나 질문을 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가 주께 단순한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하여 나왔다고 그 동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으로서 그는 그의 동료들과 관계를 끊으며, 주님의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그러한 선언에 대하여 주께서 어떻게 반응을 하시나 보려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고백이 확실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이 온전한 헌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의 반응은 그 사람의 진술이 진지한 것인지 묻지 않으시고, 단순히 그 사람이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참된 제자도가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고”(58절) 하였습니다. 주님은 격언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그의 신적인 권세나 치유의 기적적인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락(comfort)이나 편안한 삶은 그의 계획이 아니며, 여우나 새보다도 오히려 육체적 편안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목적은 그 서기관의 헌신에 대한 진실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참된 헌신에 따르는 대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감동을 받고 감명 깊은 고백은 하기 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많은 자들이 믿음으로 처음 고백하는 것이 얕고 피상적임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원래 변하기 쉽고, 불안정하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는 것이 병 고침이나 배부름과 같은 개인적인 유익을 바라는 소망과 흥분으로 자기에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 자기 부인, 희생, 고난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락함, 편안함을 원합니다. 이 서기관도 주님을 따르는 데에 대한 어떤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 대답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진심으로 따를 때에는 이 세상 삶의 안일을 포기해야 합니다. 비록 삶의 안락함이나 편안함은 없을지 몰라도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며 감사하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힘들고 불편한 어려움 속에도 심령에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59절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였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 사람의 요구는 당연한 것 같아 보입니다. 유대인은 시체를 방부하여 오래 보관하지 않고, 빨리 준비하여 무덤에 둡니다. 그뿐 아니라 유대 전통에 의하면 죽은 부모를 위하여 약 30일을 애곡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려고 하니, 부친의 장례를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의 요구는 아버지가 이미 죽었는데 장사 지내도록 허락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예수님이 아버지 장례도 못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이 문구는 당시 중동 지방의 비유적인 이야기로 아버지가 죽어서 그 유산이 나누어질 때까지 그의 아버지를 도와 가업을 책임지는 아들의 말입니다. 그 아들이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그에게 해당되는 유산은 적어지거나 아예 없어지기 때문에, ‘나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라는 말은 내가 유산을 제대로 받을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면 잃어버릴 그 유산을 생각하고 주를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60절) 하셨습니다. 이것도 격언적인 비유입니다. 그 뜻은 세상이 세상 일들을 처리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그들 자신들의 일을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유산에, 돈에 관심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앞에 나온 서기관과 마찬가지로 이 제자도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다 분명히 그렇게 대가를 치르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61절)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도 지극히 당연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잠깐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도록 해달라는 말입니다. 아마 이 사람의 집이 좀 멀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마치 옛날에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르고자 할 때에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왕상 19:20)라고 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예기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뜻은 자신이 가진 소 12마리로 가족들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고 따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돌아가라고 했고 정말 그렇게 제사를 드리고 엘리야를 좇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엘리사처럼 하나님에게 대한 그런 헌신이 있어서 가족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가족에게 인사하고 오겠다면서 주님을 따르기를 미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62절)고 하셨습니다. 가까운 가족들과 관계조차,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 일에 미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미루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지체하지 말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창 19:23-25). 실제로 나중에 예수님은 종말에 있을 사건들을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1하-32)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하나님 나라의 일이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잘 따라가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라가려는데 가로막는 것들이 있습니까? 우선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고 주님을 따라가려고 하십니까? 그래서 지금 좀 힘들어도 따라가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기질을 버려야 합니다. 우뢰의 아들들처럼 혈기를 부리면 안됩니다. 못된 성질을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귀하게 여기며 붙잡는 어떤 것이든 주를 따르는 것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주님은 명백하게 주께 헌신은 전적으로, 100%이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헌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 따라갈 때에 불편한 것보다는 편안하고 안락한 것이 더 좋다고 한다면 아직 따르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니면 따라가다가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불편함을 참고 주님을 따르는 자라야 정말 제자일 것입니다. 제자는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입니다(눅 9:23). 내가 편하고 싶은 것을 물리치고 힘들어도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또한, 아직도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아니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다면 주님을 따르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여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 6:24)고 하였고, 이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기를 미루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하는데 나중에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실 주님 따르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마 9:37). 왜냐하면 사람들이 미루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중에 믿겠다고, 나중에 하겠다고 하는 사람치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탄 마귀가 잘 쓰는 방법이 바로 사람들로 미루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상 내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의 권세, 사랑, 지혜, 능력 등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만 그들 자신들을 주께 드리기에, 온전히 주님을 따르는 데에 실패하였습니다. 주님을 칭송하기도 하고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리고는 사라져 버립니다. 개인적인 편안함 또는 돈에 대한 욕심과 같은 장애 때문에 말입니다. 미루기 때문에 말입니다. 19세기 영국 리버풀의 유명한 감독 John C. Ryle 은 그의 주석에서, “지옥으로 가는 가장 슬픈 길은 강대상 아래를 달리며, 성경책을 지나치고, 경고와 초청의 중간을 달리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따르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중심을 보시고 주께서 여러분의 편안함, 돈,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등을 빼앗아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여러분의 마음가짐은 그 모든 것들을 주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정말 여러분의 주가 되시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말로만 주님께 아무리 충성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힘들고 어렵게 하더라도 하늘나라 소망으로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참된 그리스도인답게, 참 제자로서 굳세게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해도, 돕지 않더라도 아니 사탄 마귀가 방해를 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좇으라”(59절; 마 4:19)는 주님의 명령을 받들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절하)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 모두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뒤를 보지 말고, 앞만 보고 밀고(press on) 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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