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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1-24 (일) 07:09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9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눅 13:31-35)


‘평강의 왕’이신 우리 예수님은 ironically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죽이려는 대적들로부터 생명이 위태로웠습니다. 자신이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낸 공생애 3년, 특별히 마지막 한주간은 많은 사람들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동족 유대인들은 물론 로마 관원들에 이르기까지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 분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원하시고, 영원한 형벌에서 건져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대적들도 불쌍히 여기셔서 열정적으로 긍휼을 베푸시기 원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매달려 극심한 고통 중에도 자신을 못 박으며 조롱하는 자들을 위하여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절상)라고 하신 분입니다.

지난 주일 살펴보았듯이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더 늦기 전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24-28절). 때가 되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가는 자가 많기 때문에, 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고 있다는 것으로 당연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록 예수님과 함께 자리를 했다 하더라도, 먹고 마셨다고 하더라도, 진리의 말씀을 배웠다 하더라도 그들을 모른다고 하시며, 오히려 악을 행했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지 않았기에 율법의 규정들을 좀 지켰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맺지 못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결국 그들의 종착역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사탄 마귀의 나라, 지옥으로 거기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말씀을 마친 후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예수님에게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31절)라고 합니다. 당시 예수님은 베레아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참고- 마 19:1, 막 10:1). 예수님이 태어날 때 2살 이하의 모든 유대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했던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 죽고 나서 그의 세 아들,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헤롯 아켈라오(Herod Archelaus), 헤롯 빌립(Herod Philip)이 이스라엘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누가가 말하는 31절의 헤롯은 갈릴리 지역과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 안디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헤롯 안디바가 바로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불륜을 저지르며 아내로 삼은 사실을 세례 요한이 옳지 않다고 죄라고 지적하며 꾸짖으니까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헤로디아의 간계로 나중에 목을 베었던 것입니다(막 6:17-28). 아마도 그 후에 예수님이 자신이 세례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지, 아니면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듣고 분봉왕인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했는지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바리새인들이 이 이야기를 예수님에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결코 예수님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방금 그들을 향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기에 나중에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인데 말입니다. 아마도 어쩌면 헤롯 안디바가 죽이려고 한다는 정보를 주어서 자기들의 영역에서 예수님을 쫓아 내려고 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니면 자신들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는데 그 책임을 헤롯 안디바에게 돌리려는 수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뜻밖입니다. 그들이 제시한 위협적인 정보에 대해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가 나타납니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2-33절)고 하십니다. 헤롯 안디바를 교활한 여우(fox)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우는 하나님의 나라를 허무는 교활한 짐승으로 나옵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아 2:15)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즉 지금 예수님은 ‘헤롯은 나의 귀신을 쫓으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알지만 그 일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그 늙은 여우에게 가서 잠깐 기다리라고 해라. 나는 오늘도, 내일도 마귀의 일을 멸해야 한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들을 고쳐야 한다. 이제 며칠 후면 끝날 것이다. 나는 결코 헤롯으로 인해 내 계획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내 일정도 바꾸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하실 수 있다. 나는 내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할 것이다. 이 사명은 과거 참 선지자들이 순교당했던 곳, 예루살렘에서 끝나게 된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과 내일, 며칠 더 계속하다가 삼일, 곧 하나님의 완전한 때에 마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므낫세 왕(왕하 21:16)과 여호야김 왕(왕하 24:4) 때에 예루살렘에서 이사야 선지자나 스가랴 선지자의 무죄한 피를 흘리게 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예루살렘에서 동족 유대인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구속해야 하는 사명 때문에 예수님은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베레아에서 사역을 하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게 되는데, 이는 메시아 사역을 향한 구속사적 여행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걸음이 이렇게 단호했던 예수님이 돌연 예루살렘을 향한 안타까움과 비통함을 담은 슬픈 부르짖음으로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34절)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부르짖음은 예루살렘의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것입니다. 과거 조상적부터 하나님이 보낸 사자들과 참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돌로 쳐서 죽였던 것처럼, 이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는 모습을 미리 내다보고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암탉이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모아 보호하는 모습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모으려고 한 적이 얼마나 많았느냐, 그런데 새끼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거역했습니다. 암탉, 어미새의 사랑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과거에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심판으로부터 구원해주려고 하나님의 사자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어 회개를 촉구하고 돌이키라고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이 곧은 그 백성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숭배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하나님의 선택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는 그들이 메시아를 거절하고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결국을 아시기에 슬픈 것입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19장 41절에 예루살렘 성 가까이 도착하셔서 예수님께서 우셨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우신 경우가 몇 번 없습니다. 사랑했던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 앞에서 그 백성들이 심판을 받을 것을 내다보고 우신 것입니다. 마치 메시아의 예표라고 할 수 있는 다윗 왕이 자신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아들 암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절하)고 슬퍼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을 향하여 예언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35절)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겠다’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주후 70년에 로마 디도 황제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인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며,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나중에 예수님이 메시아 임을 알아볼 때에는 너무 늦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재림 하실 때 알아보고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할지라도 늦은 것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나라 밖으로 쫓겨난 자들로, 지옥에서 슬피 울며 후회하고 고통 속에 이를 갈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칼빈은 그의 고전 ‘기독교 강요’ 1권 2장 3항에서 ‘Your idea of God’s nature is not clear unless you acknowledge Him to the origin and fountain of all goodness’ 곧, ‘만약 하나님이 모든 선함의 근원과 샘이 되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당신의 개념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절대주권으로 다스리시지만 또한 은혜로우시며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임을, 선하신 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시 116:5) 하였고, 다윗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 145:8) 하였습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9-12)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고, 그 날개 위에 새끼를 업는다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인간을 향한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마 15:32, 20:34). 심지어 자신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자들까지 불쌍히 여기시며 어미새처럼 품으시려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실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당시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을 무시합니다. 구원을 거절합니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롬 10:21; 사 65:2)고 하신 것처럼, 사랑의 손을 내미시는데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건지시기 원하며, 보호하시기 원하시는데 원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사랑과 자비를 무시하고 거절하면 그 후에 심판이 있습니다. 그 때 후회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분들을 향해 우리 주님은 오늘 울고 계시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거절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시고 새끼를 품는 어미새와 같이 품고 보호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는 분이 계십니까?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며 울고 계시는데 그 눈물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선하신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그 아들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 사랑을 받고 따뜻한 품 안에 거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그 사랑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자꾸 죄를 지으면 곤란합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우리의 얼굴을 보기 원하지 않으십니다. 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 능력으로 싸워야 합니다. 얼마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동서남북에서 넘어뜨리려고 해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3)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 12:4) 라고 책망하였듯이, 우리는 피를 흘리는 한이 있더라도 죄와 싸워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내일도 그 고귀한 사랑, 자비와 긍휼을 기억하고 주님 품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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