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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1-31 (일) 07:3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29    
낮아지고, 긍휼을 베푸십시오 (눅 14:1-14)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로 믿고 따라가는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살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어떤 종교를 믿는 자들이나 불신자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상식적인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영생을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과 축복으로 살면서 교만하여 높아지려고 하고, 불우한 형제 자매들을 차갑게 대하며 긍휼을 베풀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셨던 예수님도 낮고 낮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을 베푸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큰 자비와 긍휼을 힘입고 살면서 더욱 낮아지고 주위 사람들에게 인자와 자비를 베푸는 것이 당연한데 실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늘 높은 자리에 앉아 대접 받기를 원하며 위선적인 모습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계속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중,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들의 지도자 집에 초청을 받아 식사하러 들어가셨습니다(1절). 당시 중요한 손님을 초대하는 식사는 지혜의 말씀 강론과 함께 오후 중간에 시작하여 저녁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부잣집은 약 10명 안팎으로 초대했다고 합니다. 식탁은 그리스-로마 문화로서 주로 U 형으로 생겼는데, 가운데에 주인이 앉고 양쪽으로 상석이라 주인이 초대한 지체 높은 사람들이 차례로 앉았다고 합니다.
이전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눅 7:36; 11:37). 그들은 순수한 동기로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책잡기 위하여, 비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도 1절 하반절에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엿보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넓은 의미로 ‘주의 깊게 보다’라는 뜻이지만, 문맥상 여기서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지켜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번역이 ‘엿보다’가 잘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고창병(수종병, dropsy or edema) 걸린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병은 허파나 간, 또는 콩팥이 잘 작용하지 않아 온 몸이 붓는 병을 가리킵니다. 당시 랍비들은 이런 병은 본인이 부정하거나 부도덕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이 벌을 내려서 그렇다고 보고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초청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자가 그 자리에 초청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덫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즉 불순한 의도로 그 자리에 병자를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미 그들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3절)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들이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뜻밖에도 그들은 침묵하였습니다(4절상).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규정해 놓았기에 고쳐주는 것이 옳지 않지만, 비상한 상황에서 예외도 있었기 때문이고, 안 고쳐주면 주위 사람들에게 눈치도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반론인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이미 이런 논리로 얼마 전에 18년된 귀신들린 여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었던 것입니다(눅 13:10-16). 그러니까 그때처럼 그들은 부끄러워 아무런 대답도 못했던 것입니다(6절).
우리는 어떤가요? 어려운 일 당한 사람을 안식일의 규정 때문에 도와주지 못한다면, 율법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어서 그 자리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말합니다. 우선은 초청을 받은 율법사들와 바리새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7-11절), 다음에 초대한 바리새인 지도자 주인에게 교훈하는 내용입니다(12-14절).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8-10절)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주요 손님으로 초청 받은 것이니 당연히 예수님에게 윗자리를 권해야 할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상석,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라고 한 것입니다. 높은 자리는 지혜를 가르치는 ‘주요 손님’의 자리인 것을 알면서도 거기 앉아 대접 받고 싶은 갈망으로 그냥 앉은 것입니다.
그 때 주인이 와서 그 사람에게 주요 손님이나 지체 높은 사람에게 그 자리를 내주라고 하면 부끄러워서 말석, 낮은 자리로 갈 때 실망하고 창피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차라리 낮은 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친구여 윗자리로 올라 앉으라고 하면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을, 높임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유사한 말씀을 했습니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체 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 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잠 25:6-7)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반전(eschatological reverse)’에 대해 교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 주님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할 때에 지금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고 있는 그들에게 훗날 그 나라에서는 인정도 받지 못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역설적인 말씀인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세리나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는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또 하십니다(눅 18:14).
마찬가지로 지금 사회생활이나 교회생활에서 여러분의 처신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인격은 미성숙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위나 부, 지식을 가지고 거드름을 피우며 목에 힘주는 사람들은 아직 한참 갈 길이 먼 것입니다. 믿음의 내용도, 품격도 많이 모자란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사시면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오히려 다 내려놓고 스스로 낮춘다면, 때가 되면 주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렇게 높여주셨습니다. 낮고 낮은 자리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결과 높고 높은 자리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혀 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잔치에 초청한 주인에게 교훈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12-14절)고 하셨습니다. 손님을 초청할 때 친구나 형제, 친척이나 부자들을 청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 대가로 주인을 초청하여 갚을 것이니 네게 복이 되거나 상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복, 상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초청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누구에게 초청을 받으면 당연히 그 사람을 우리 집으로 초청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떻게 대접을 받고 가만히 있습니까? 도리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내가 은혜를 베푼 사람이 은혜를 갚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서로 주고 받은 것이니 특별히 하나님께서 복을 줄게 없는 것입니다. 물론 훨씬 더 많이 베풀었으면 하나님께서 아시고 적절하게 복을, 상을 주시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주된 말씀은 잔치에 가난한 자들, 병자들, 장애우들을 초청하면 그들은 주인의 은혜를 갚으려고 그 주인을 초청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신 복을,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가 아니면 훗날 주님 재림하셔서 우리가 다 부활하게 되어 천국에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하십니다. 마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셨듯이, 지극히 작은 자들, 갚을 길이 없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물을 주고,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본 것에 대하여 마치 자신에게 한 것처럼 갚아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25:35-36).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은혜를 받고 도저히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가난한 자들, 병자들, 장애우들이 갚지 못할 사람들이기에 초청하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도 존귀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베풀면 돌아올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초대하지 않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설교에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47)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분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가난하고, 지위도 낮고, 병들고, 장애가 있다고 해서 은혜의 자리, 초청의 자리에 나가지 않는 자들도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갚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으로 믿고 초청에 응해야 주인이 하나님께 복을, 상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해야 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서로 복을 받지 못하게 하면 안됩니다. 제가 늘 주장합니다. 성경적으로 우리 성도들은 자존심(pride or ego)이 없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죄를 짓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대신 자긍심(self-esteem)이,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가난하고 병들고 하여 내세울 것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 하나만으로 긍지를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눈에는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본문의 요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고 하신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롬 12:16)고 하였고, 야고보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5:10)고하였고,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고 하였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의 교훈입니다. 늘 낮아지십시오. 주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라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합니다(빌 2:3).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제발 인색하지 마십시오. 너그럽게 주는 자, 베푸는 자가 되십시오. 하나님에게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믿는 자라면 수없이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 명령이 ‘사랑하라’가 아닙니까? 주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그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율법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 긍휼하심을 나타내고 살아야 합니다. 입으로만 아니라 실제 행실로 말입니다.
아니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고 하셨습니다. 매일 연약하여 죄를 짓고 사는 우리들 아닙니까?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으로, 말로 실수하지 않나요?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늘 더욱 낮아지고 낮아져서 우리 주위 사람들을, 특별히 어렵고 비천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며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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