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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2-14 (일) 08:4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85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눅 14:25-35)



조금만 지혜로운 사람은 무슨 일을 시작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비용이 드는지 생각하고 합니다. 상식적인 예기입니다. 아무 것도 계산하지 않고 하다가는 마칠 수가 없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합니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Savior)와 주(Lord)로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그 엄청난 귀한 선물을 받았으면 주님을 따라가면서 그 은혜를 갚고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에 즐겁게 찬송하며 따라갑니다. 바로 주님의 참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왕이 초청한 잔치에 간다고 하고서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거절한 유대종교 지도자들을 꾸짖고, 오히려 비천한 자들, 처음에 초청 받지 못한 모든 자들을 불러서 잔치에 참여하게 한다는(14-24절)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은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릅니다(25절). 따르는 그들을 향하여 오늘 본문에 ‘무엇 무엇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예수님이 세 번을 강조합니다(26절, 27절, 33절).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반드시 행하여야 할 것과 치러야 할 대가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 중에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내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과 참 제자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25절) 하십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당시 “미워하다(μισε,ω)”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의 뜻이 아닙니다. 우선순위의 개념입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자매, 아니 자기 목숨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 하였습니다. 즉 참 제자는 가족이나 친지나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와의 관계보다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가장 우선순위에 놓는 자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대망하고 살았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을 시켜주고, 의와 평강의 영원한 나라를 그 땅에 세워줄 것으로 알았습니다. 메시아를 평강의 왕으로 알았습니다(사 9:6).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전에 맛보지 못한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 평안을 경험하였습니다. 복음은 정말 평화의 소식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과의 평화를 허락하였습니다. 이 평화를 맛본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과도 평화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악하고, 타락한 인간의 죄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계속 배척을 당하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까지 미쳐서 때로 불화하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마 10:36). 그래서 어떤 때는 주님의 제자들과 불신 가족 사이의 틈은 평생 화해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제자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릅니다. 눈물을 삼키며 주님을 택합니다.
   그런데 가끔 믿는다고 하는 남편들이나 아내들이 그들의 배우자와의 사이가 멀어질까 두려워 예수께로 온전히 나오지 못함을 봅니다. 믿음 때문에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두려워, 부모는 또한 자녀들에게 미움을 살까 봐 두려워 참 제자가 되지 못함을 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된 후에 온 가족을 주께로 인도하는 경우가 있기에 그런 두려움에 대하여 우습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 한 사람이 참 제자가 되면 불신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나 부모에게 미움이 되어 오랫동안 고통 가운데 살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주님의 주권 하에 삶을 맡기는 것이 너무도 큰 일이고, 중요한 것이기에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라도 주님보다는 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기 위하여 그런 고통 속에 살지만 남편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헤어지자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고전 7:14-15). 그 성도의 평안을 위하여 갈라져도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이 땅에 완전한 평화의 나라를 세우시고, 평강의 왕께서 친히 다스리시기에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허나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제자들에게 내적 평안을 주는 복음은 때로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아픔을 하나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래서 갚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고 약속하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셔야 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는 그 가족을 희생적으로 사랑합니다. 참 제자인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으며, 자식들에게 헌신되어 있습니다. 또한 참 제자인 자녀들은 부모들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 제자의 주께 대한 헌신은 그런 가족 관계보다 훨씬 더 깊고, 넓고, 뜨거운 것이어서 만약 가족관계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런 가족들이 차선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절)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8-39)고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너무 사랑하는 것이 종종 주께 헌신하는 데에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목숨을 내 놓기까지 나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십니다. 로마 제국 아래 팔레스틴 지역에 살던 사람이면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잔혹함, 고통의 극치를 의미합니다. 아니 죽음을 뜻합니다. 아무리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십자가에 비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잔인한 남편, 패역한 자식, 죽을 병, 심지어 내 집이 불에 타거나 물에 떠내려 가는 시험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은 아닙니다. 생명을 내 놓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 합당한 자는 자기 생명, 목숨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생명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 쳐도 때가 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전부인 줄 알고 붙잡는다면 잃어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 이 세상 잠깐 누리는 생명까지 버린다면 그는 기념비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 순교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 뜻과 계획조차도 주님을 위하여 포기할 수 있는 자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참 제자가 치러야 할 대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합니다. 먼저 망대 건설 비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28-30절)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짓고자 할 때 얼마가 들지 계산하고 그 비용이 있어야 시작하지, 무작정 시작하여 기초만 덜렁 세우고 끝내지 못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예기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총 공사비가 얼마나 들것이며 그 비용을 어떻게 해서든지 충당할 수 있을 때 시작하는 것이 상식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한 나라의 임금이 전쟁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31-32절)고 하십니다. 전쟁을 하려고 하는데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싸워야지,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이 되면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자고 해야지 혈기만 가지고 무모하게 싸우면 당연히 패하여 불명예를 안고 나라는 망할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숫자만 가지고 전쟁하는 것 아니지요. 적이 숫자가 많아도 오합지졸이면 얼마든지 싸우지요. 그러니까 잘 알아보고 전쟁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비유도 미리 헤아려 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려면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을 각오하라는 뜻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고 하십니다. 물질에 대한 소유를 말합니다. 또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진 것 다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부 다 주님을 위해 바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고 하였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우리 자신과 가족의 필요를 채워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은 소유욕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딤전 6:10; 마 6:24). 물질에 대한 우선순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마 6:33).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시는 소유로서 신실한 청지기(steward)로 잘 사용해야 합니다. 청지기가 주인이 맡겨준 것들을 내 것이라 생각하고 꼭 쥐고 있으면 안됩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라면 하나님의 것을 내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34-35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소금은 꼭 필요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이유는 짠맛을 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시 사해 소금은 음식물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땅에 뿌려서 잡초도 제거하고 칼슘이 토양을 개량시키고 아울러 인분의 부패를 억제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이 그 맛을 잃었다면 어디에 쓸 수 있습니까? 아무데도 못 사용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다 소금이라고 하면서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져 사람에게 밟힌다고 하였습니다(마 5:13).
그런데 여러분, 소금이 짠맛이 전혀 없는 소금을 보셨습니까? 짠 농도는 약간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 맛이 없는 소금은 없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아니지요. 무슨 말씀입니까? 전혀 맛이 없는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혀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밖에 던져져서 불신자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 제자도의 특성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선순위가 잘못된 사람, 주님을 따라가는 데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주님에게 헌신과 충성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진실로 믿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다 주님에게 ‘종’으로서 온전히 헌신하였으며, 만왕의 왕에게 충성하였습니다.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다 비방을 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창 6:14) 묵묵히 오랫동안 큰 배를 지었습니다. 비를 본 적도 없어서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어도 기꺼이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가운데 인류의 명맥을 잇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 할 때(창 22:2)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창 12:2)을 믿고 소망 가운데 기꺼이 아들을 바쳤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말을 잘 못하던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출 3:10) 바로 왕궁에서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하나님의 사자(messenger)로 그 백성을 이끌고 430년 노예생활을 끝내고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즉 모세의 믿음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믿는 자들을 그렇게 핍박하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울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이었으나(행 9:15-16) 온갖 핍박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끝까지 충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의 앞서간 수많은 주님의 제자들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 헌신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 축복의 통로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인생 여정은 하나도 예외 없이 기꺼이 주님을 따르는 대가를 치르고,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온전히 100%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부분적인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가장 큰 계명, 명령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신 6:5) 입니다. 우리의 부모, 처자, 형제, 자매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목숨,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자신을 포기하고 삽니다. 희생합니다. 죽음까지도 두렵지 않습니다. 신랑이신 주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진 것 모두 하나님의 선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믿고 얼마든지 드립니다. 그래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사랑과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말씀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천국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는 소금입니다. 맛을 내는 소금입니다. 예수님처럼 이 세상 누구나 필요한 소금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은 그런 소금이 필요해 오늘도 찾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소금이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어떤 대가든지 기꺼이 치르며 주님을 따라가는 참 제자이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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