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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2-28 (일) 23:5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57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눅 15:11-32)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개인적으로, 경험적으로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신학적인 용어로 ‘신론’에 대한 질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너무 광대하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셔서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이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꼭 알아야 할 진리를 오늘도 성경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종종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잃어버린 양(4-7절)과 잃어버린 동전(8-9절)의 비유 다음에 나오는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저는 탕자인 작은 아들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할 수도 있고, 어쩌면 작은 아들보다 더 탕자인 큰 아들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큰 아들도 탕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 아버지인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늘 비유의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3절). 그들을 큰 아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마치 연극을 보는듯한 이 비유의 이야기는 모두 3 막(Acts) 혹은 세 장면(Scenes)로 되어 있습니다. 첫 장면은(제 1막: 12-16절)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집을 나가 살 테니 나중에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12절). 그는 가족에 얽매어 살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원했습니다. 이런 요구는 공적으로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하며, 이제 자신이 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냥 죽은 줄로 여기라는 뜻이었습니다. 관계를 끊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관습에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는 것은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얼른 죽어버리라는 암시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산도 두 아들이 있으면 큰 아들이 2/3, 작은 아들이 1/3로 분배하여야 했습니다(신 21:17). 그런데 아마 아버지는 반을 준 것입니다(12절하).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에는 이런 작은 아들은 제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에 너무 어긋나기에, 거의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정도로 악한 요구였습니다. 당장 규례에 따라 처단하거나 그냥 쫓아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 속의 아버지는 그냥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재산까지 나눠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아버지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교훈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죄인들이 죄의 길을 선택하여 가겠다고 할 때 자유롭게 가도록 허락합니다. 억지로 막지 않습니다. 물론 작은 아들처럼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을, 대가를 나중에 치러야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 재산의 반을 가지고 먼 이방나라에 가서 작은 아들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여 재산을 다 허비하게 되었는데, 또한 그 이방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더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 살며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13-15절).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으며 끼니를 이어가는데, 나중엔 그것조차 주는 이가 없습니다(16절).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돼지 우리를 치며, 돼지가 먹는 것을 먹게 되다가 그것도 없어서 굶게 되어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는 계명을 어겼기에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으로, 잘 되었다고, 그는 어쩌면 그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제 둘째 장면으로(제 2막: 17-24절) 바뀌면서 이 아들은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을 봅니다. 자신이 비참하게 된 때 아버지와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17절). 그래서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고(18절, 21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아들로 생각해주지 않고 그저 품꾼으로 생각해주기만 해도 감사하겠다는 마음으로 말입니다(19절). 그래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이요,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런데 이미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날부터 언제나 아들이 돌아올까 생각하며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20절).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에 못을 박고 떠난 악한 아들을 기다리는 모습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보통 육신의 아버지와는 다른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드디어 이 날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아버지의 마음이 무너집니다. 너무 반갑고, 그저 불쌍히 여기고, 반갑게 맞으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20절). 돼지 우리에서 살았기에 얼마나 더러운 냄새와 추한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런 겉 모습이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들을 시켜서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게 합니다(22절). 이게 웬 은혜입니까? 그냥 종으로만, 품꾼으로만 받아주어도 황송한데 아들의 자격을, 명예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잔치를 베풉니다. 이웃들을 초대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고 먹고 함께 즐깁니다(23절). 이유는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잃어버렸다 찾았다는 것입니다(24절). 앞선 비유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고 기뻐 즐거워하던 목자처럼, 잃어버린 한 은전을 찾고 기뻐 즐거워하던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이나 은전이 아니라, 아들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쁨은 훨씬 더할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하게 떠난 탕자가 돌아오면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릴 것입니다. 죽도록 일을 시키며 그가 허랑방탕하게 낭비한 돈을 다 갚으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니 14장에서 이야기한 하늘나라 잔치에 가난한 자, 장애인, 세리와 죄인을 초청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을 향하여 참고 기다려 줍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할 때, 이미 이 아들이 어떻게 되리라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마냥 기다렸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참으로 잘 용서합니다.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기에 말입니다.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재산을 달라고 하였던 아들입니다. 자신이 큰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소문이 다 나서 창피하기가 말이 아닙니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합니다. 용납합니다. 아버지에게 죄 용서를 빌며 돌아온 아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하는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그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분입니다. 그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괜찮습니다. 여기 작은 아들처럼 돌아서기만 하면 양팔을 벌이고 받아주십니다. 너무 기뻐하십니다. 천군천사들과 잔치를 베푸십니다. 잃어버린 많은 재산을 아깝게 여기며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돼지를 치다가 온 더러운 몰골을 보고도 껴안았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는 아들에게 신분을 회복시켜주며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여러분!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이 무엇입니까? 전혀 무가치한 사람, 아무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런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면서 실제로 용서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버림 받는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이러한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와 긍휼을 입고 산다면 정말 감사하며, 자족하고 살아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또 무엇을 원하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그리하지 아니할지라도 감사하며 찬양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세 번째 장면(제 3막: 25절-32절)은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악한 말과 행동을 하는 큰 아들이 등장합니다.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작은 아들보다 더 못되게 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으로 이웃까지 초청하여 온 가족에게 잔치를 열었는데 큰 아들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28절). 오히려 화( vorgi,zw, wrath)를 냅니다. 이 단어는 그냥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격노하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간청합니다. 그랬더니 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빠져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보시요( vIdou., Look)!”라고 합니다. 죽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유산을 나눠달라고 했던 작은 아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노예와 주인의 관계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은 노예처럼 열심히 섬기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음에도 아버지가 자신과 친구를 위하여 잔치 한번 베풀어 준 적이 없는데(29절), 탕자인 동생은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와 함께 낭비하여 집안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푼다고 아버지를 비난합니다(30절). 자기는 아버지를 위하여 일을 열심히 했기에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아버지가 해주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반면에 동생은 이미 아버지가 죽으면 받을 유산을 가지고 떠나버려 아들의 지위를 버렸으니까 자기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가리켜 “(당신의) 이 아들이 돌아오매”(30절)라고 합니다. 자기와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장면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큰 아들의 당연한 논리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지위, 명예를 회복해주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의 이 말과 행동은 아버지 편에서 보면 완전히 아버지에게 반기를 드는, 반역하는 행동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은 어디로 갔습니까? 자신들 편에 판단할 때에 아버지가 비상식적인 행동을 보이면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심보가 아닙니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도 부르지 않으면서, 자신을 가족으로부터 떼어놓는 불효자의 행동입니다. 즉 작은 아들은 겉으로 드러난 분명한 죄인이었으나, 큰 아들은 속으로 은밀하게 죄를 짓는 더 악한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큰 아들도 탕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큰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반응을 보십시오.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에는 “얘(Te,knon, Child)”이라고 번역했으나, 원래는 “아들아!” 입니다. 큰 아들의 모욕적인 말과 못된 행동에 대해서도 참으시면서 그를 인격적으로 설득하려고 하는 아버지입니다. 자기에게 불순종하며 거역하는 큰 아들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너는 동생과 달리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마음을 달랩니다. 가족이 갈라지는 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가족은 하나다. 네 동생이 돌아왔으니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마땅하다’고 외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죄인들을 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었던, 잃어버린 자들을 찾은 예수님의 충만한 기쁨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큰 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더 이상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습니다. 15장이 끝나 버립니다. 다만 16장에서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청지기 비유를 말하면서 큰 아들은 주인으로부터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청지기로 나타납니다. 바로 이 청지기가 아버지의 사랑도 받아왔고, 아버지의 재산도 관리하도록 먼저 부름을 받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결국 큰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헤아리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를 고소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인지 너무나도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우리 아버지들이 약간은 이해할 수 있는 비유입니다만, 이 세상 어떤 아버지도 그런 은혜와 긍휼을 베풀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정말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고, 땅끝보다 길고, 하늘보다 높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구하노라”(엡 3:17-19)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이 큰 은혜와 사랑을 안다면 그 어떤 죄인도 당연히 회개하고 돌아오겠지요. 모든 것을 감사하겠지요. 어떻게 이 비유의 작은 아들처럼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죄 짓는 길을 선택하지 않겠지요. 잘 몰라서 그렇게 잘못 살았다 하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겠지요.
아니 혹시 큰 아들처럼 사시는 분은 없습니까? 자기 의를 드러내며 인정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죄 짓는 자들을 향하여 비판과 비난으로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연약한 지체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렇게 기뻐 받으시는데 우리가 누구라고 그들을 냉정하게 대한다는 말입니까? 그저 감사하며, 사랑할 뿐입니다. 사실 우리도 다 똑 같은 연약한 죄인이 아닙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은혜와 긍휼을 바라고, 의지하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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