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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4-04 (일) 02:32
분 류 절기설교
ㆍ조회: 875    
참된 예배의 회복 (요 4:23-24)


꽤 많은 분들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2021년 부활절을 맞이하며 우리의 예배가 회복이 되기 원합니다. 예배가 회복이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게 되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손길로 회복이, 부흥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며, 우리 인간의 최고의 은혜가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주님께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찾아가 만나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려고 찾으시는 자들이 있는데,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아 만나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이 아니면 찾아 만나주시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교인들을 볼 때 너무 안타깝고, 특히 교회의 지도자, 직분자임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며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분들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예배를 능가하는 삶이 없고, 삶을 능가하는 예배’가 없다고 했는데, 전적으로 공감하는, 성경적인 선언이라고 믿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없다면, 예배에도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평소의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의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들은 공적 예배의 중요성을 압니다. 공적 예배가 믿는 자들의 가장 큰 의무인 줄 알기에 목숨을 걸고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는데, 참으로 예배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참된 예배(True Worship)이 무엇입니까? 아니 참된 예배를 논하기 전에 예배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예배를 드린다면 출발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예배 시간에 내 감정의 표현을 한다는 뜻입니까? 그래서 내 안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종종 ‘오늘 예배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실컷 웃거나 울고 나면 은혜를 받은 것인가요?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도 얼마든지 웃거나 눈물을 흘리며 좋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은혜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종교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지한 순간이 되면 기도하는 마음이나 자세가 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도’하는 순간은 가장 숭고하고 거룩한 시간으로 알고 있고,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준다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종교적인 본성과 우상 숭배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우상 숭배는 종교심이 타락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종교심은 ‘무엇인가 영원한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만나는 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역시 죄 문제였습니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반드시 자기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고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제사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 자기 안에 얼마나 깊은 죄의 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부인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의 은혜는 직접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간접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죄인인가를 끊임없이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갈 3:24-25).
   구약 성경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우상들, 태양이나 돌부처처럼 인격이 없는 분이 아니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을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지 자기 안에 있는 서러움이나 답답함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할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아무리 눈물을 많이 흘렸고, 또 짐승을 태우는 과정에서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것은 그 후에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피의 제사가 필요했고, 그 후에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는 예배 행위 자체로 자기 만족을 누리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사 자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편이었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했을 때에 그들의 예배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 안에 있는 종교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참된 예배의 핵심은 예배가 얼마나 엄숙하느냐 엄숙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할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싫어할 때에 이방인들의 예배와 같이 그저 하나의 종교행사가 될 수 밖에 없었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에는 아무리 형식이 초라해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그 예배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 임하곤 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의 예배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하여 직접적인 자기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한 시간의 예배 그 자체로 종교적인 마음의 만족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가 자꾸 감각적으로 변하게 되고, 목사는 자꾸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해서 ‘은혜’를 받게 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며, 생활을 통하여 순종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니까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설교로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는 설교자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23절에도 있는 말씀을 반복하셨는데, 어떤 예배가 신령(in spirit)과 진리(in truth)로 드리는 예배인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가?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감정적으로 열렬히 예배를 드렸는가 하면, 대조적으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지적으로만 율법을 낭독하는 것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으신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신약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는 단번의 제사를 드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교회에 성령을 부으심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을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약교회는 구약의 성전보다 더 완벽한 성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임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함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맞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영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눈 앞에서 짐승을 잡아 죽임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짐승을 죽이는 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죄의 선포를 받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영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찬양이나 찬양대 찬양도 마치 연주회에서 연주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함께 마음으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배 순서 하나 하나에는 모두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일어서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 신앙고백을 드리는 것, 우리의 지은 죄를 고백하고 또 사죄의 은혜를 받는 것,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헌금을 드리고 또 설교자가 축도함으로 교인들을 축복하고 세상에 파송하는 것 각각에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냥 되는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순서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참된 예배입니다.
   설교 전에 이루어지는 죄의 고백이나 용서의 확인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던 번제에 해당합니다. 그 때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에 대하여 진심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찢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신앙을 확인하는 신앙고백과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순서가 건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졸거나, 옆 사람하고 속삭이거나, 주보를 연구하거나, 전화를 받거나, 자꾸 시계를 보면서 ‘왜 빨리 끝나지 않지’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하면 그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 가운데 은혜를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만나고자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죄성을 가진 목사들을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칼빈을 말하기를 ‘목사가 성경을 풀어 설교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원천적인 권위는 성경 그 자체에 있지만, 성경을 벗어나지 않는, 성경을 그대로 설교한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동일한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하나님 영광의 절정, 영광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정말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면 바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깊은 갈급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을 받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의 갈급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죄 문제이고 죄가 파생시킨 수많은 상처들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인간의 죄를 치료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주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설교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있다면 이것은 마치 무자격 의사가 사람을 수술하겠다고 덤벼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성도들에게 만족을 주려고 하는 것은 정직한 목회가 아닙니다. 목사는 말씀의 종입니다. 설교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소명입니다. 기도하며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하여 오늘날 고통 받으면서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참 의미를 전해줄 사명을 지녔으며,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없는 교인을 잃을 각오와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정직하게 외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교인들은 정말 성경 말씀만 전하려는 목사가 누구인지 알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사모하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찾아 만나주시겠다고 하는데 거절하시겠습니까? 소중한 만남을 위하여 얼마나 준비하십니까? 참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지난 시간 동안 그렇게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면, 오늘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의 심령이 부활하기 바랍니다. 예배의 회복과 부흥(revival)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다 잘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로 모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성전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우리 죄를 덮고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 안에서 내가 살겠다는 각오입니다. 예배와 생활이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평소에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고서 예배 드리러 오면 예배가 어색하고, 기도와 찬양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 내내 쓸데없는 염려와 잡생각에 빠져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최선을 다하여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고서 예배에 임하면 예배 시작부터 찬송에 힘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나주시는 참된 예배는 내가 변화 받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기적을 체험합니다. 항상 참된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삶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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