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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5-23 (일) 04:4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59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21)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부활하셨음을 보이시고,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10일 만에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행 2:1-4). 오늘이 바로 부활절 후 50일째가 되어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모든 성도들 안에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것입니다(고전 3:16; 6:19). 모든 성도는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엡 1:13). 이 성령이 구원의 보증이 되시며 영원한 안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고후 5:5).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순간 성령께서는 함께 하시며,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졌어도 그 안에 성령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는 것과 성령이 충만한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성령충만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먼저 성령충만이 아닌 것을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첫째, 성령충만이라는 것이 성도들에게 갑자기 나타나는 환상적이고 이상한 경험, 소위 말하는 뜨거운 신비한 체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처음 강림할 때에 나타난 역사는 증거를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런 체험은 어떤 사람에게 고유하게 임하는 일시적인 성령의 특별한 역사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이 성령충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후에 어떤 영적인 더 높은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그와는 정반대로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이성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 육신의 노력일지 모릅니다. 셋째, 성령이 점차적으로 채워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을 성령을 얼만큼 많이 소유하느냐는 정도 차이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실 때에 어떤 사람에게는 조금만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시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령충만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18절)고 하는 "충만을 받으라(be filled; plhrou`sqe)"는 문법적으로 원형동사의 2인칭 복수 현재 수동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자면 '너희는 계속하여 채워지도록 하라(be being kept filled)' 는 말입니다. 복수로 쓰였으니까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특별한 몇 몇 사람들에게만 성령충만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현재형으로 쓰였으니까 계속적으로 매 순간 충만한 상태에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즉 과거에 충만했었던 것을 의지하거나, 앞으로 충만해질 것이라는 기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충만한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또, 명령형입니다. 성령충만 해도 되고 안해도 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성도도 성령충만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수동형으로 쓰였으므로 하나님에 의하여 성령충만 하여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충만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즉 성령충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주하는 성령님에게 내어 맡기는, 양보하는(yield) 것일 뿐입니다.
'충만하다'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1) 돛단배가 잘 항해할 수 있도록 바람이 잘 불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님에 의하여 우리 성도의 삶이 앞으로 잘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2) 고기나 야채를 소금에 절일 때에 소금기가 그 속을 스며들어 맛을 내거나 방부제의 역할을 할 때에 사용한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은 성령이 우리의 삶을 스며들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성품들을 나타내는 자녀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3) 이 단어는 전적인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슬픔이 충만한 사람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완전히 슬픈 감정이 그를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요 16:6).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은 두려움(눅 5:26), 분노(눅 6:11), 사탄(행 5:3), 혹은 믿음(행 6:5)이 충만하면 그 말과 행동이 그런 것들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18절상)라고 대조를 하였듯이, 술 취한 사람은 알코올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지배가 없이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반대로 성령의 지배를 받아 충만케 되면 이 세상이 주는 욕망, 두려움, 심지어 세상적인 목적, 가치기준 등이 나와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 목적이나 비전 등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성령충만의 결과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사는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세가지, 찬송과 감사와 복종입니다. 첫째는 내적인 것이며, 둘째는 위를 향하는 것이며, 셋째는 외적인 것입니다. 1) 성령충만이 우리 자신들에게 미치는 결과는 찬송하는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19절) 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삶은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성령충만을 받은 첫째 결과는 특별한 영적인 경험도 아니요,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도 아니요, 단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입니다. 좋은 음성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음정과 박자를 조금 틀리더라도 성령의 지배로 부르는 노래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 기쁨과 축복이 마음에 가득하여 신령한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 노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들에게 세상이 만들 수 없는 새 노래, 정결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주십니다. 그래서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찌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찌어다"(시 96:1-2)고 하였지요.
누구와 함께 부르는 노래입니까?  "서로 화답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성도들끼리 서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에서 서로 노래하는 것을 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함께 한마음으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노래는 구원을 입은 성도들이 서로 부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는 노래입니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이 부르는 노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그의 영광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부르는 노래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입니다. "시(psalms)"는 기본적으로 구약의 시편에 음악을 붙여 노래하는 것입니다. 주로 하나님의 성품이나 성도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신 주님을 찬양하되 그 하나님을 높이며 영화롭게 하는 찬양입니다. "찬미(hymns)"는 "시(psalms)"와 구별한다면, 초대교회에서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주 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빌립보서 2장 6-11절, 골로새서 1장 15-20절, 또는 디모데전서 3장 16절 등에 곡을 붙여서 부르는 찬양입니다. 한편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s)"는 더 넓은 범위의 영적인 진리를 담은 노래들로 믿음의 증거가 되는 노래들을 말합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이런 세 종류의 노래가 있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찬양이 넘치는 교회가 성령충만한 교회(성도)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교회(성도)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찬송하신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12; 시 22:22)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아 노래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주를 위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노래인 것입니다.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Johann Sebastian Bach 는 말하기를 ‘모든 음악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2) 성령충만을 받은 결과는 하나님께 감사로 나타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20절)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히브리어에서는 감사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찬양(hallel)이라는 단어에 그 감사의 뜻이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 19절과 연결되는 20절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성도는 언제 감사합니까?  "항상"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우리의 삶을 주권적으로 다스리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항상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려움과 환란을 주실 때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요 그 주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을 때에 감사하는 것은 대부분의 믿는 사람들이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하면 어려울 때에 앞으로의 축복을 소망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감사합니까?  "범사", 즉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이유는 모든 것이 다 주께로 말미암았음을 감사하며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 5:18)고 하였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진실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지극히 작은 것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 선하심, 구원 등에 대하여서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서도, 축복과 어려움도, 승리와 패배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사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가' 에 근거한 감사입니다. 참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사역에 기초한 감사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축복이 되며, 그에게는 궁극적인 영광이 됨을 믿는 것입니다.
3) 성령충만을 받는 삶은 복종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절)고 성령충만의 세 번째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겸손하여 집니다. 겸손하기에 자기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 특히 다른 성도들에게 복종하며 그들의 유익을 구합니다. 여기 "복종하다(u`pota,ssw)"라는 말은 원래 군대용어로 계급이 한 단계 낮은 것을 뜻합니다. 즉 성령충만한 성도들은 늘 자신은 한 단계 낮추어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의 말씀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올라가려고 늘 자신이 높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려고 하지만, 성령충만한 성도들은 늘 낮아져서 다른 성도들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나중에 더욱 높여 주시지요.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성령 충만하십니까? 성령충만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려면 우선 죄에 대한 고백이,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죄를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성령이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자아가 죽어져야 합니다. 이기적인 내 뜻, 내 의지, 내 지성,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여야 성령께서 충만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사모하시면서 열심히 간구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풍성히 거하여야 성령충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히 받고 그 속에 거하며, 우리의 모든 삶에 스며들게 하면 저절로 성령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충만은 곧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말씀의 충만입니다. 말씀 충만한 사람은 그 말씀이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됨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영적 아킬레스 건은 죄성을 아직도 갖고 있는 육체입니다. 그러므로 이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오직 한 길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 성령충만입니다. 유혹, 죄, 사탄의 능력에 대항하는 오직 한 길은 성령의 능력뿐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그러한 악의 능력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대신 싸워주실 경우에만 승리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어떤 신비한 뜨거운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영적 높은 단계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점차적으로 충만해 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령세례 받는, 성령의 인침을 받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충만은 이미 받은 성령께서 나를 온전히 주장하셔서 내 삶을 지배하도록 내어 맡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힘에 의하여 한 걸음씩 인도함을 받는 것, 내 모든 삶의 영역에 성령께서 스며들어 역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일시적인 것도 아니고 현재 계속적으로 매 순간 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다면 반드시 증거가 있습니다. 그 입에 주님을 향한 찬양이 있으며, 감사가 넘치며,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갈 5:22-23). 그리고, 하나님의 큰 일인 전도를 하게 됩니다(행 2:1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합니다. 그래서 이런 주님을 닮은 성품이 보이지 않고, 전도하지 않는 성령 충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여 진실로 회개하여 돌아서고, 내 자아를 온전히 죽여서 내 이기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성령충만을 간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함으로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아 성령충만의 삶으로 승리하시며,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축복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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