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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7-25 (일) 04:0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779    
부를 사랑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눅 18:18-30)


예수님께 한번은 어떤 관원(ruler)이 찾아왔습니다. 관원이라 함은 어느 회당장 혹은 바리새인들 중 지도자입니다. 그는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크게 호감이 가는 성격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외모를 가지고 있고, 하는 말도 정중하고, 도덕적으로 살던 고상하고 윤리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재물도 많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평판이 좋은 관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에 대하여도 정확히 알지 못했어도 비교적 바르게 이해하고 존경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진정한 구원, 영생을 얻으려면 다른 무엇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무슨 착한 일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부러워할 것이 없는 것을 다 갖고 있어도 그의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나 진정한 평화, 안식, 미래의 소망, 영혼 깊은 곳의 기쁨 등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러한 선물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질문을 하게 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절)?
마태복음에 의하면 이 관원은 부자 청년이었습니다(마 19:16-29). 우선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랍비)이여"(18절) 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믿고 있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구원이 선한 무슨 일을 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처럼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는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해야, 공을 쌓아야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합니다. 물론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들에서는 모두 그것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천주교에서도 내가 공을 쌓아야 온전한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의 질문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절)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선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선한 이가 없고, 그 분이 하시는 일 만이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원은 아직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절)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중에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야 할 다섯 계명들을 말씀하시지만, 초점은 어느 누구도 온전하게 (perfectly) 지킬 수 없는 계명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라고 하였기에, 죄인이 자신의 행동으로 구원을 얻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다섯 계명을 지키라고 하니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절)라고 하는 것을 보면, 자긍심이라고 할까, 육적, 영적인 자만으로 인하여 자신이 죄인 임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히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즉 이 관원은 자신의 심령을 드려다 보지 못하여, 자신은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대한 관심도 있고, 영생에 대하여 관심도 있지만,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기에 자기의 죄로부터 구원해 주실 주님을 믿고자 하는 준비가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참된 제자의 첫 걸음은 내가 진정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면, 예수님의 보혈로 내 모든 죄가 씻기지 아니하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원은 자기 나름대로 살인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고, 도적질한 적도 없고, 거짓말한 적도 없고, 부모도 공경했고, 이웃도 사랑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정도면 나는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의 기준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답하시기를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22절)고 하십니다. 앞에서 말한 계명도 온전히 지킨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지켰다고 하니 테스트하듯이 다른 계명들도 다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6:5, 마 22:37)가 아닙니까? 그는 세상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좇으라고 하였더니,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에 심히 근심했다고 합니다(23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가 있는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을 준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가 계명들을 다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고 마음을 온전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제자는 정말 이 세상의 재물, 명예, 행복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이미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의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에 따라 말을 하고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보십니다. 구원은, 영생은 한 사람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구세주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을 마음으로 믿고, 그 이후 마음이 그에게 정하여 지고,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어느 것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참된 제자인 것입니다.

근심하고 떠나는 이 관원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설명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25절)고 하십니다. 그 동안 계속 강조해 오신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의지가 요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을 약대(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가 모든 육신적 필요를 채워주고, 그 외에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필요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라고 꾸짖으신 것을 기억합니까? 그 교인들이 외적으로 부자인지 몰라도 내적으로, 영적으로 정말 곤고한,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교회였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기 보다 이 세상 재물을 더 좋아한다면 그의 마음은 구원을 받을 준비가 안된 것입니다. 대부분 부자들은 특히 이 세상의 은행 구좌, 주식 투자, 부동산 등 소유하고 있는 재물에 그 마음이 얽매어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은 자기 보물이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마 6:21). 그러니 부자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관심을 갖기 어려운 것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도 가시떨기에 뿌려진 것처럼 곧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막 4:18-19). 사실 어떤 사람이 소유한 모든 재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 8:18상)고 생각하고 감사해야 마땅한데, 심지어 신자들까지도 유혹을 받아 그들의 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원함과 욕심을 다 채우고 나서야 남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위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하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부자 관원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재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재물을 의지하는 마음이 문제였지요.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기준(계명)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기 의가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부를 위하여 사는 자들의 관심은 대체로 재물을 지키고, 늘리고, 즐기고자 하는 데에 있으니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절)라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수세기에 걸쳐서 랍비들이 가르쳐 오기를 재물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여 주신 복으로, 부자는 모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구원 받기가 힘들다고 하니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절)고 응답하십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고 이 세상에서 업적을 많이 남겼어도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전혀 무능력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마음을 변화시키실 수 있고,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먼저 된 신자들이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의 진리를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선포할 때에 성령의 역사로 그 사람이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아오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지, 정, 의를 동원하여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그를 받아들여서 가능한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은 사도 베드로는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 하고 주님께 묻습니다. 즉 베드로는 ‘주님 우리는 제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 본래 직업도 다 버리고, 가족이나, 친구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좇았습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였고, 당신을 주로 모시고 그 주권에 다 복종하고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29-30절)고 합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을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포기한 것들에 대하여 미래의 영원한 천국에서의 상급뿐 아니라 이생에서도 백 배를 받게 되는데 핍박이 따른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되면, 진심으로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여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되면 때때로 어떤 관계들에 대하여 등을 돌려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아주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말입니다. 가족이나 친족, 가까웠던 친구들조차, 유산 등의 재물까지도 포기하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음 때문에 가정에서 핍박을 받고 쫓겨 났다면 하나님의 권속들로 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허락해 주십니다. 형제, 자매,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았다면 주 안에서의 형제, 자매, 자식들을 허락해 주십니다. 전토 등 재물을 포기하였으면 몇 배로 더 허락하여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난하게 된 참된 제자는 이생에서도 여러 가지 복을 받고 미래의 영원한 세상에서도 복을 받게 됩니다. 엄청난 축복이요, 확실하게 보장된 축복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복은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앞 날을 알 수 없는 재물입니다.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도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오늘 살다가 내일 죽어버리면 다 남의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안전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모든 재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제자인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재물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또한 이 복은 다른 사람에게도 축복이 됩니다.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 백성들과 나누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이중적인 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참된 제자가 되려면 버릴 것은 다 버리고 주를 좇아야 합니다. 마음을 말합니다. 육신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재물에 관한 욕심을 말하지만, 명예심, 권력을 갖고자 하는 마음, 정욕 등을 다 버려야 합니다. 잠시 없어질 그러한 것들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면 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이 주님께 고정이 되면 버릴 수 있습니다. 본문의 부자 관원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도 못하였지만, 그 마음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영생도 얻고 싶고, 재물도 많이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주님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미래에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무덤에도 가지고 못 가는 재물입니다. 하물며 짧은 인생 살다가 죽은 후에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한다면 세상에서 재물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였어도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부자 중에도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온전히 주를 좇아가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는 것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 중에도 마음에 이 세상에 속하여 없어질 것들을 추구하며 지옥을 향하여 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빈부가 이슈가 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주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 위하여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초월하고 사십니까? 영생의 축복뿐만 아니라 이생에서도 축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확실히 믿으시고 현재 조금 힘들고 어려워도 이생과 내세에서 주실 위대한 복과 상급을 기대하면서, 참고 인내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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