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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7-29 (목) 23:48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771    
행함이 있는 믿음 (약 2:14-20)


앞선 문맥에서 우리는 성경의 최고의 법인 마음과 뜻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교회(성도)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차별한다면 말이 되느냐? 그러면 가장 큰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서는 참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선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하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 아닙니까?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구원을 받은 믿음이라면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예수님이 구세주요, 주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정의로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믿음이 있다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최고의 법을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믿는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15-16절)라고 한 것입니다. 형제나 자매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으면서 말로만 가서 먹어라 하고서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아주 상식적인 말씀입니다. 만약 내가 전혀 도울 수 없는, 나도 굶어가는 사정이라면 괜찮습니다. 그 때는 동정하면서 따뜻한 말 한 마디도 도움이 됩니다. 그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데 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없는,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기에 그런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요일 3:18)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로만 믿는, 머리로만 믿는 지적인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참 믿음은 행함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믿음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역동적으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씨는 아무리 좋은 땅에 심어도,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도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씨는 생명력이 있기에 반드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 15:2)고 하셨습니다. 삶에 열매가 없으면 죽은 믿음이기에 제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데, 열매가 없으니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이요, 구원을 받는 믿음이라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랑으로 하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니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기에 뭐 굳이 보여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믿음이 있다 하면서 행함이 없는, 열매가 없는 자들에게 도전합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믿음이 없는 것 같으냐? 그러나 나는 행함이 있으니까 내 믿음이 네 믿음보다 진짜가 아니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어떤 사람이 교회도 오랫동안 다니고 교회 일에 열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서 선한 믿음의 증거(열매)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불신자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를 어떤 초신자가 도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래 믿었다고 자랑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경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일도 많이 하고, 신앙도 최고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당신이 보이고 있는 모습은 사랑이 전혀 없는 모습이라 초신자인 나보다 행함이 너무 없습니다. 진짜 믿음이라면 행동으로 보이십시오’라고 말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의 행동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19절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치명적인, 무서운 말씀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가 지적으로는 하나님이 한 분인 줄 믿고 다른 우상숭배자들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지식은 타락한 귀신들도 믿고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마 8:29; 막 3:11). 그래서 두려워 떨었다고 하였습니다. 즉 19절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들이 믿는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신앙은 거의 귀신들의 신앙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신앙이라고 할 수 있나요? 아니지요!
그래서 배워서 알고 있는 지식을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산 지식인지 테스트를, 시험을 쳐보아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설교를 듣고 어떤 내용을 기억한다고 해서 그 말씀을 통해 그 사람의 믿음이 생겼다, 혹은 자랐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그 말씀이 감동을 주었고, 그 결과 태도와 사고방식에 변화를 일으켰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실제로 행동으로 나타내는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알고 있다고 해서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적용되어 실제 삶에 변화가 있어야 정말 말씀을 들은 것이고 믿음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아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절) 라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것이 정말 옳다는 것을 강조하며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히 배우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허탄한(keno,j, empty)”이라는 표현은 ‘빈손으로 거저 보내다’에서 나온 말로 ‘머리가 텅 빈’이라는 뜻입니다. “헛것(av,rgoj, barren)”은 ‘열매가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머리가 빈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열매가 없는 것이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일관된 주제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복음에, 진리의 말씀에 전 인격적인 반응을 보여야 참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 성령님을 보내시고 함께 하시면서 역사하는 줄 알고 구세주로 믿고,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진리의 말씀을 듣고 지적으로 깨달은 후에 가슴에 뜨거움 있어야 합니다. 감정의 반응입니다. 귀한 진리를 깨닫고 마음이 냉랭하다는 것은 아직 진리를 가슴으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들처럼 머리로만 믿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회개와 그 크신 사랑에 대한 감격과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따뜻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이 의지로 작용하여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의지를 사용하여 결단하고 선한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의무를, 책임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사랑 때문에 절제합니다. 감정적으로만 아니라 의지적으로 죄를 미워합니다. 죄 짓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겉으로 그 모습과 행동이 드러납니다. 열매가 나타납니다.
누구나 죄성이 있기에 자기 마음대로 즐기며 살기를 원합니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있기에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애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할 의지가 없으니까 주위 이웃들에게도 사랑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수도를 틀기만 하면 저장되어 있는 물이 나오듯이 조금만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감동을 받으면 밖으로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사실을 스스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병이 들었는데 내가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신입니다. 참 믿음이 있는 자는 그 문제를 하나님에게 맡기고 간절히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의 뜻 안에서 아픈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 다른 사람의 영혼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은혜를 베푸는 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의 죄도 용서하시고 내가 하는 일에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선한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이 되면 두 번 생각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두 번 생각하면 마귀가 흔들어서 마음을 바꾸어 은혜의 통로를 막습니다.
참 믿음이 생명력이 있는 것은 가만히 있지 않고 무엇인가 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역사하는 성령님이라는 뜻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죽은 자처럼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이 그 속에 있기에 다른 사람을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자기를 조금 희생하여 불을 붙이는 믿음입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비판만 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성으로 인한 우리의 습관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기 싫어하는 고집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말씀을 들을 때도 어느 선에 적당히 듣고 자신의 태도나 사고방식은 바꾸지 않으려고 합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우리의 심령을 찌르는 데도, 끊임없이 선한 영향을 끼치려는 데도 고집스럽게 저항을 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듣기 싫은 것은 스스로 합리화를 시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들을 금방 머리 속에서 떠올립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지 않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과 타협합니다. ‘그것은 바꾸지 못하지만 대신 다른 것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과 거래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못하지만, 대신 이런 일들을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봐 달라는 식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위로하며 불안한 마음을, 죄책감을 덜어냅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이 이런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는 그 말씀을 가지고 토론을 합니다. 즉 말씀을 놓고 논쟁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의견이 이러 쿵 저러 쿵 하면서 확실한 것은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는 빠져나갑니다. 알기는 귀신처럼 압니다.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믿음이 없는 자보다 더 양심이 굳어져서 자기가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교만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자들이 정말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사용하셔서 그 고집을 꺾어 버리십니다. 양심의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죄책감으로 괴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말씀을 그의 삶에 적용하고 살도록 역사하십니다. 아니면, 그에게 고난을 허락하셔서 겸손하게 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이 잘 될 때에는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잘 되니까요. 그러나 어려움이 계속되면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고난의 소용돌이 속에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무 마음을 열지 않고 이리 저리 빠지는 사람에게는 고난을 주셔서 라도 변화를 받게 하십니다. 물론 고난이 너무 심하면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어서 감당할 만한 것만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기 전에 하나님에게 두 손들도 나아오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정의를 총 동원하여 전 인격적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주위에 흐르기를 바랍니다. 행동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마시고, 깨우쳐 주실 때마다 그대로 행하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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