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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8-01 (일) 01:5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25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 (눅 18:31-34)


와싱톤 D.C. 국회 의사당과 백악관 앞 광장, 링컨 대통령 기념관이 늘어서 있는 Mall에 가장 우뚝 솟아 있는 것이 Washington Monument(현충탑) 이며, 그 옆에는 월남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 벽과 또 6. 25 한국동란 기념물 조각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미국사람들이 세계 여러 나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하여 대신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일들로 인한 교훈을 삼자는 것입니다. 또 아직도 있는지 모르지만,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다 보면 북쪽으로 여러 군데에 깨끗하고 말끔하게 단장된 가로수 곁에 다 부서진 콘크리트 무더기가 흉악하게 철근을 드러낸 채로 있습니다. 그것이 6. 25 한국동란 때에 공산군의 폭격을 받아 부서진 아군의 참호라고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와 싸우던 그 날의 처참한 상황과 목숨을 바쳐 그 참호에서 국토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사망한 이름 없는 병사들의 충성과 희생을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없애지 않고 눈에 띄도록 길 가 곁에 있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 일을 알고 기억하는지 의문입니다. 대부분이 잊고 있기에 요즈음에 나타나는 위험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잊고 있는 신앙의 주제가 있다면 그 중의 하나가 십자가일 것입니다. 1930년대부터 미국 교회들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비평하기 시작하며, 성경을 부분적으로 믿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삐뚤어지기 시작하면서 한국 교회들도 덩달아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과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New Age Movement 의 영향을 받게 되어 강단에서 십자가 설교를 자주 듣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은 교회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많이 모으려는 욕심으로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중심의 인본주의로 흘러가다 보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설교하며, 죄를 회개하라고 하면 싫어하고 그저 위로하고 격려하는 설교나 예화만 좋아합니다.
그런데 교회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신약성경에 제시된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마다 하나님께서 항상 이 십자가의 도를 신앙의 중심이 되게 하였습니다. 교회가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지에 대한 가장 뛰어난 척도는 바로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입니다. 강단이 십자가의 복음을 원색적으로 선포하고, 성도들이 이 십자가의 진리를 인하여 감격하며, 회개하며, 변화를 받고, 부활의 소망으로 십자가 고난의 삶을 통하여 실현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 교회의 모습은 신약성경에 제시된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이며, 그런 교회의 모습으로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미 선포한 말씀으로 세 번씩(눅 9:21-22, 44-45; 그리고 본문)이나 이제 곧 다가올 자신의 수난, 십자가의 죽음, 부활을 다시 예고하십니다. 아주 단순하고도 명료한 예언입니다. 무슨 비밀이나 깊은 신학적인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저들이 당하게 될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또 반복하여 말씀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죽음과 부활은 신구약 성경 전체 계시의 가장 중심에 있는 사건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이 사건이 이제 바로 눈 앞에 와 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엄청난 고난과 위험이 예수님에게는 물론 자신들에게도 닥칠 것을 미리 알고 예비하도록 강조하십니다. 이유는 제자들에게는 지금 또다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얼마나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사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처럼 제자들은 사자를 기대하고 있었지, 희생당할 어린 양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의 죽음, 부활은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던 것이며, 당하실 고난의 구체적인 내용과 주님께서 인내하며 감당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선, 이제 하나님의 계획 아래 때가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절)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9장 51절부터 베레아를 지나 요단강 동편 쪽으로 여행을 하시다가 여리고를 지나, 거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갈릴리나 요단강 주변과 달리 해발 2,500 ft의 높은 지역에 있었기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있었지만 결국 12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오르십니다.
지난 3년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초자연적인 능력과 기적들을 보고 증거하였고, 그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도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습니다. 전적으로 주님 만을 의지하며 이 시간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고, 헛된 것으로, 소망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말씀하시는 메시아의 고난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군대를 일으켜 로마 정부를 뒤엎고 나라를 세우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34절)고 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구약에 예언되어진 말씀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우연도 아니고, 무슨 운명적인 것도 아닙니다. 주전 1400년경에 모세를 통하여 유월절 어린 양이신 메시아의 뼈가 꺾여지지 않을 것을 예언하셨고(출 12:46), 시편 기자들을 통하여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수족을 찔릴 것이(시 22:16), 그 겉옷이 나누이며 속옷이 제비 뽑힐 것이(시 22:18),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신음하실 것이(시 22:1), 군병들이 식초로 입에 대실 것이(시 69:21), 죽음에서 살아나실 것이(시 16:10),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실 것이(시 110:1) 구체적으로 예언되었습니다. 또한 주전 500년경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아가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이(슥 9:9), 은 30전에 팔리실 것이(11:12), 친구들로부터 배신당하실 것이(13:7), 그리고 창에 찔림 받으실 것이(12:10) 예언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이사야 53장 등 구약에서 여러 곳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의 예표, 혹은 모형으로 그가 세상 죄를 위하여 죽으시어야 만 하는 말씀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후에 그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하여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던 하나님이십니다(창 3:21). 인류의 시작부터 죄책감(guilt)은 동물의 희생으로 덮여졌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100세에 받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주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고 자식을 죽이려고 칼을 뽑았던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수양을 준비하셔서 이삭의 자리를 대신 희생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을 할 때에 9가지의 기적과 같은 재앙으로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지만, 결국 10번째의 재앙,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면하게 하실 때에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그들의 집에 문설주에 발라 면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장자는 무사하였고, 결국 바로가 그들을 내보낸 것이 아닙니까? 출애굽을 하고 광야 생활을 할 때에도 성막을 세우게 하시고 흠 없고 순전한 희생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 그들의 추한 죄를 덮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가죽옷, 숫양, 어린 양, 각종 희생 제물 이 모두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상징입니다. 그런 희생 제물들은 죄책감을 덮어줄 수는 있었어도 죄를 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없이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올라간다고 알았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준비한 그 유월절 어린 양임을 몰랐습니다. 아직도 사자를 생각하고 있지 양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세우실 나라를 생각하고 있지, 희생 제물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영광을 누릴 것을 생각하고 있지, 고난과 죽음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제자들은 메시아에 대하여 가르치는 구약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반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말씀하시는 데도 원래 굳어져 있는 사상 때문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를 못합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부활하고 나서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5-26) 하고 주님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영안이 열려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고 가르치심을 받자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눅 24:45-46)이 기록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먼저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고전 15:3-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언제나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32-33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지금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인지 미리 아시고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계십니다. 자신을 ‘인자’라고 하신 것은 메시아의 성육신과 겸손을 의미하는 명칭입니다. 이제 자신이 한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여 산헤드린 공회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의하여 이방인들, 로마 정부로 넘겨져서 죽게 될 것을 아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마음대로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억울한 종교재판을 당하시고, 로마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졌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인 것을 알고 놓아주려고 했으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빌라도를 협박하여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가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 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지고, 그들이 온갖 모욕과 멸시를 하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발가벗기어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지며, 발가벗은 몸에 철 채찍을 휘둘러서 살점이 피와 함께 튀어나오고, 가시 면류관을 씌워 머리에서도 피가 흐르는 수난을 겪습니다. 그리고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를 사형할 때에 사용하는 십자가에 주님을 못 박습니다. 양 손과 양 발을 포개어 놓고 길다란 못을 박아 십자가 나무에 걸어 놓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또 정말 죽었는지 로마 군병들이 확인하기 위하여 허리를 창에 찔리십니다. 약 6시간을 못에 매달려 계시다가 결국 숨을 거두십니다. 이런 엄청난 고난을 참아야 했던 우리 주님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영적인 고통,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고통이 가장 컸습니다. 그래서 크게 소리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절규를 하셨던 주님이십니다(마 27:48). 이러한 고통을 주전 700년경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 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 53:5-8)라고 예언하였었습니다. 제자들의 배신을 맛보는 고통,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고통, 이방인들에게 모욕당하는 고통, 심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시고 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수난이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구원하시려고, 그토록 싫어하시는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즉 죄인이지만 복음을 믿기에 하나님의 의를 심어 주셔서 의인이라고 불러 주시기 위하여서 말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은 또한 이러한 수난 이후에 부활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33절하)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생각과 달리, 그를 대적하던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주님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결코 그 아들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라고 부활도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장사 지낸 지 사흘 만에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다시는 고난을, 죽음을 맛보지 않게 하셨습니다. 영생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를 멸하며, 그 죄에 대한 대가인 사망을 정복하기 위하여서 였으며, 그의 부활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기 위하여서 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이 고난의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이 십자가를 경험하셨습니까? 생각할 때마다 감동과 감격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신구약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대로 성취되었고, 지금도 성취되고 있고, 앞으로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확실히 믿고, 여러분의 삶에 최고 권위로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더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그 십자가의 은혜로 현재의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소망 가운데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의 거룩한 삶 때문에 받는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죄와 맞서 싸워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 12:4) 라고 꾸짖으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또 다시 못 박는 일을 행하는, 능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으시고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후에 영광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영광의 길은 항상 고난의 계곡을 지나야 합니다. 잘 참고 인내하여 결국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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