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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9-05 (일) 04:4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03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예수님 (눅 19:29-44)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우시는 장면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한번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남동생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라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었던 나사로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함께 슬퍼하며 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흘 후에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시는 것입니다(41절). 헬라어 원어를 살펴보니 그냥 훌쩍 거리시는 것이 아니라 통곡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왜 그렇게 우셨을까요?
 
여리고에서 삭개오의 가정의 구원을 선포하시고, 열 므나의 비유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믿음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신실하게 일하여 열매를 맺을 것을 말씀하신 후, 드디어 예루살렘 성 가까이 벳바게와 베다니 근처에 도착했습니다(29절). 유월절 일주일 전 금요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쩌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의 집에서 안식일을 지낸 후 주일 아침에 제자 둘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30-31절)고 하십니다.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맞은편 마을에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3년 동안의 사역처럼 그냥 걸어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도 있을텐데 왜 굳이 나귀새끼를 풀어 오라고 하였을까요? 이는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500여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아,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이는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타고 왕 위에 오른다는 말씀입니다. 화려하게 등극하는 세상의 왕들과 달리 우리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시기에 그렇게 왕 위에 오르십니다.
여기서 잠시 그 나귀새끼의 주인과 그 짐승에게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두 제자들을 시켜 주인에게 메여 있는 그 나귀들을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실 때에,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31절) 하셨습니다. 정말 그대로 그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즉시 보내어 주었습니다. 주인이 믿음이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주로, 왕으로 알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십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지 그가 쓰고 싶은 만물이나 사람을, 쓰고 싶은 시간에, 쓰고 싶은 장소에서 자유자재로 쓰실 수 있는 주님이시요, 왕이십니다. 인생은 이러한 주님의 쓰심에 순종할 청지기인 것입니다. 사실 주께 쓰임 받는 자체가 축복이지요.
사람이 자기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저 착각하고 사는 것이지요. 우리 생명을, 우리 시간을, 우리 건강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주께 쓰임을 받을 때 비로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소유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인의 뜻을 좇아 나귀를 풀어 주께 나왔을 때에, 그 나귀의 존재 의의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한편 그 나귀새끼 어떠합니까? 우리를 나귀로 비유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람에게 얽매어 있던 나귀, 풀어주지 않으면 자유를 얻을 수 없었던 나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시니 풀려졌습니다. 주인이 놓아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가 주께 쓰임 받기를 사모하면 묶인 어떤 것도 풀어주십니다. 죄로부터, 욕심으로부터, 열등감으로부터, 질병으로부터,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풀어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를 위하여 쓰임 받기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묶인 것을 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소용이 없는 사람은 그 어떤 것에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묶인 것에서 풀려나고 형통케 하시는 축복 속에 마음껏 쓰임 받다가 하나님 앞에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예수님에게로 끌로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안장 대신에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태우며 갑니다(35절). 예루살렘 성 가까이 다가가자 많은 군중들과 제자들은 지금까지 보아온 이적들을 마음에 떠올리며 기쁨과 환호 속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37절).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드디어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로 여기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바로 다가온 예수님의 메시아적 운명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지, 잘못된 믿음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로 인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나 군중과 달리 바리새인들은 이 노래가 예수님께 맞추어서 불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이 같은 노래를 하나님께 부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책망을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습니다(39절). 제자들과 군중들도 잘못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또 다른 각도에서 잘못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이미 열 므나의 비유에서 이런 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14절)라고 한 자들로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누가‘도대체 예수님이 누구냐?’라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예수를 믿습니다. 바로 가르쳐 주어도 듣지를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신의 부와 건강, 성공과 행복, 혹은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주실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군중들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들을 채워 주실 분이라고 믿으며 예수님을 크게 찬양합니다. 그래서 마치 이 군중들이 며칠 지나지 않아 주님을 버리며 떠나갔듯이 내가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주님을 버립니다.
예수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하라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주님의 대답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40절) 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 향한 제자들과 무리들의 환영과 찬양은 비록 잘못 믿고 하더라도 그 노래 자체는 참이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었기에 어느 피조물이라도 이를 거스릴 수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의지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와 잘못된 믿음 앞에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앞으로 멸망할 그 백성들을 생각하며 통곡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을 위하여,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메시아를 보내셨건만, 이들은 아직도 영적 소경인 것이 안타깝고 슬펐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42절)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만과 전통, 관습에 얽매어 더 이상 메시아를 바로 볼 수 없다면 이들은 기필코 하나님의 정하신 심판의 날들을 피하지 못할 것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 또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43-44절)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문자적으로 주후 70년 로마 황제 디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의 멸망으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마지막 하나님의 대 심판을 여실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죄인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이로 인해 장차 올 심판 날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을 보면 마음이 찐해 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리 주님이 그렇게 우십니다. 혹시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 교회를 향하여, 가정을 향하여, 개인을 향하여 울고 계시지는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이 지금은 자신들 나름대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잠시 후면 거의 다 자신을 배신하고, 버리고,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있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기대가 무너져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겠습니까?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예수님이 ‘주(Lord)’이십니까? 한 피조물로서 당연히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한 심령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때를 놓치게 되면 슬퍼하며 우십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될 일을 생각하고 우십니다. 잘못 믿는 것이나 믿지 않는 것이나 다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올바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대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이나 할 것 없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성직자의 자질이 저하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앉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왜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조차 삶이 정직하지 못하여 불신자들에게 조롱을 받아야 합니까? 근본적인 문제의 본질은 잘못된 신앙,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를, 가정을 부패하게 하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닐지 몰라도 올바로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로 믿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 만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율법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단호한 도전을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십자가의 복음,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를 변질시키는 가장 큰 대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들어서 복음의 혼합화 현상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에다 심리학을 뒤섞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들먹이지만 실제 내용은 심리학자의 주장의 영향을 받아 설교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에 사회주의를 뒤섞어 버립니다. 설교에서 주님의 말씀보다는 철학사상의 이야기가 더 강하게 들리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에다 동양 철학 명상 사상을 섞어 버립니다. 또 어떤 이는 복음에다 세상 Show Business 사상을 섞어 버립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이 공연 장소가 되어 버립니다. 교인들은 구경꾼이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됩니다. 인본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 복음의 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 라고 하였는데, 실상 순수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 4:2)고 결심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무엘상에 보면 언약궤 혹은 법궤 이야기가 나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이 진 이유가 언약궤가 그 자리에 없어서 졌다고 생각하고, 언약궤를 가져오지만 여전히 블레셋에게 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무슨 부적처럼 언약궤만 있으면 이긴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블레셋 신전에 있던 언약궤로 말미암아 그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이 하룻밤 사이에 파괴되고, 그 신전이 있던 아스돗 사람들의 몸에 까닭을 모르는 독종이 퍼지기 시작하는 사건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언약궤을 다시 이스라엘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서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그와 아들 엘리아살이 관리하게 됩니다. 그 후 70년이 지난 다음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자 제일 먼저 하나님의 언약궤를 생각하고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 오기로 했습니다. 약 3만 명의 군사들이 아비나답의 집에 도착하여 엘리아살의 아들들 웃사와 아효가 언약궤를 맡고 있었는데, 그들이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예루살렘으로 행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갑자기 소가 뛰면서 수레에서 언약궤가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사실은 여기 ‘뛰다’는 단어보다는 흔들렸다는 번역이 더 정확합니다. 문제는 그 때 웃사가 손으로 언약궤를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성경의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하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행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깨에 매도록 하였는데(민 4:15), 웃사와 아효는 소가 끄는 수레로 운반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수레로 운반할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방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를 움직여야 했습니다. 또한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았다는 히브리어 단어도 그냥 잡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소유인양 꽉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웃사는 제사장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고, 잘못 믿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만약 지금 당장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미래를 본다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생각하시면서 우시지는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함께 순서에 맞추어 찬양을 부른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니면 참으로 주님께서 기쁘시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온갖 수난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셨습니다. 나의 죄 때문인 줄 알고 믿으면,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시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찬양을 드리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데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니 이미 구원의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우리 주위에 잘못 믿고 있거나, 믿지 못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우십니까?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6)라고 하였습니다. 영혼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과 잘못 믿고 있는 영혼들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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