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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10-10 (일) 03:2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721    
산 자의 하나님 (눅 20:27-40)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듯이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누구나 그 속에 종교심이, 즉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죽음 이 후의 세계에 대한 염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타락함으로 그 영원한 세계를 바라는 것이 점점 줄어들게 되어 어떤 이는 그것을 부인하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종교에서 그 영원을 소망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대부분은 영원을 사모하였습니다.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유대 탈무드에서, 그리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Tradition) 즉 ‘장로들의 유전’에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죽음 이 후의 생명에 대하여서는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구약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9-10) 라고 하였고, 다른 시편 기자도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 49:15)고 하였으며, 호세아 선지자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1-2)고 하였고, 더 확실한 말씀은 주 여호와께서 다니엘을 통하여 약속하신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죽음 이 후의 생명을 믿었을 뿐 아니라 육체의 부활까지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외의 부류가 있었는데 바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서두에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27절상) 라고 한 것입니다. 즉 당시 자유주의 신학을 신봉하던 사두개인들은 수적으로는 가장 적은 무리들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이나 열심당원(Zealots), 엣센파(Essenes) 사람들에 비하면 귀족 계급이면서 가장 부자들로 영향력을 발휘하던 종파였습니다. 당시 가장 수가 많고 인기가 있던 바리새인들은 평범한 보통사람들로서 아주 종교적이며 예식이나 의식을 강조하던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열심히 일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다고 믿었던 자들로 랍비의 전통을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게 평가하며 지키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열심당원들은 정치적이며 때때로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군사적으로 로마 정부를 뒤엎으려 했던 자들입니다. 엣센파 사람들은 죄악된 사회와 고립되기를 원하여 주로 산 속이나 동굴에서 자신들 만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구약성경을 복사하며 지냈습니다. 그래서 1947년부터 1956년경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도 그들에 의하여 쓰여진 성경 사본이었습니다.
한편 사두개인들(Sadducees)은 유대 귀족들로서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들을 관할하며 희생 제물을 팔고, 환전상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예루살렘 성전 뜰의 환전상을 뒤엎으며, 희생제물을 파는 자들의 상을 뒤엎고 내쫓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에(마 21:12-13; 눅 19:45) 가장 놀라며 예수님께 적대감을 나타내었던 자들이 바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다 사두개인들이었으며 유대 최고 의회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의 구성원들도 거의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는데 이유는 보통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정치적으로도 로마 정권의 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모세 오경(Torah) 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천사의 존재도 믿지 않았고, 영혼의 존재도 믿지 않으며,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참고: 행 23:6-8). 그래서 매우 현실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평민들로 구성되어 로마 정권을 미워하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적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신학적으로, 너무 다른 계층의 사람들로 서로 사이가 좋았을 리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며 잡으려는 데에는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도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바리새인들의 제자와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다가 실패로 끝나자(20-26절) 사두개인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유대인들 앞에서 넘어지게 하려고 시도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님을 증명하려 합니다. 도저히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찌니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세째가 저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28-33절) 라고 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꾸며 가상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오경 가운데 신명기 25장 5-6절에 있는 계대(繼代)결혼에 관한 말씀을 근거로 주님을 곤란케 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 계대결혼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택한 선민의 자손을 잇게 하려고 허락하신 결혼이었습니다(예: 창 38:8-10). 그러므로 저들은 생각하기를 분명히 예수님도 이 진리를 인정하실 것이며, 그 동안 부활도 가르쳐 오셨으니, 만약 ‘8명의 남편을 두었던 부인이 죽은 후에 부활하면 누구의 진짜 아내가 되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YES or NO 라는 단순한 대답을 기대하였으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답하십니다.
누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우선 그들이 모르는 두 가지가 있어서 오해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마 22:29)라고 하십니다. 여기 ‘오해하다(plana/w, go astray)’ 라는 말은 ‘잘못된 길로 갔다, 혹은 속인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 그들의 문제입니까?

첫째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도, 천사도 없다고 하는 그들에게 직접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대단히 잘못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34-35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나중에 부활하여 부활체가 되면 천국에서 서로 누가 누군지 알아는 보겠지만, 천국에서는 결혼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결혼제도 자체가 필요가 없는 천사들과 같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결혼 관계는 아름답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제도이지만, 전부가 이 땅에서의 일시적인 제도라는 말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의 죄성이 완전히 없어지기에 외로움, 고독을 느낄 수가 없고, 성적인 욕구도 사라지고, 부부 사이의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바랄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부부가 성관계를 통하여 아이를 낳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죽음도 없고 이 땅에서처럼 새 생명이 태어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관계는 없어지고,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만 존재할 뿐입니다. 천사들처럼 본질상 영이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히 영광 가운데 산다는 말씀입니다.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36절)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육체를 하늘의 영체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저들이 무시하고 있다’라는 말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니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0-44)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성경에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37-38절) 라고 하였습니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에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31-32)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사람이 죽은 후의 부활을 의논하고자 하면, 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모세오경 가운데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인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하신 말씀을 비롯하여 수없이 반복되는 구절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출 3:6)고 하신 말씀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현재시제로(I am)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은 훨씬 후에도 주님은 그들이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가 없는 완전한 부활체로 그들의 영혼들은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시제가 사용된 이유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현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그들이 저 하늘나라에 살아 있다는 명백한 말씀입니다. 또한 그들이 아직 살아있어야 할 이유는 그들의 이 땅에 살아있을 때에 성취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확실한 말씀입니까?
이 외에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롯하여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부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수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주된 메시지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믿는 자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20).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선물)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시험하여 함정에 빠지도록 만들어 메시아가 아님을 다른 유대인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사두개인들에게 멋진 대답을 하셨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곤궁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던 저들에게 하나님을 잘 알고 성경도 잘 알아 지혜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모세오경 가운데서도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39-40절)고 하였습니다. 즉, 또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 메시아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부활을 믿지 않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이 세상 삶이 끝이라고 믿고 제멋대로 막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성경 말씀대로 우리는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난 후에 영원한 삶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다시 부활할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6-17) 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사망이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예수님)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1-22절) 고 하였습니다.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힘있게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이 가르쳐준 이 부활을, 영생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우리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그 능력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성경의 진리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에 무지했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영혼은 영원하기에 이 육체의 죽음은 영원한 시간의 작은 한 점에 불과한 것이라는 믿게 됩니다. 신자이던 불신자이던 죽은 후에 다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고,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요 5:29). 죽음 이후에 어떤 영원을 사느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로 결정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은 나사로를 앞에 놓고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라고 물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똑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면 여러분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마르다처럼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라고 신앙의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어 영원히 벌을 받을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확실히 믿으십시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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