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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10-24 (일) 05:5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693    
헛된 영광을 구하느냐 아니면 참된 영광을? (눅 20:45-21:4)


우리 주위에는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즉 잘못된 지도자나 거짓 지도자를 만나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참으로 지도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어떤 의미로는 사실 모든 성도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 주위에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분명히 있고, 또한 가정이나 교회에서도 바라보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나 장로, 권사는 물론 집사들, 평신도들 모두가 가정에서 부모로서 지도자, 사회에서 어른으로서 지도자, 교회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후배들, 2세와 3세들에게 지도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잘못된 지도자면 우리 자신은 물론 가정과 사회, 교회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잘못된 유대종교지도자와 참된 영광을 위하여 사는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 23:2-3) 하였습니다. 모세의 자리라 함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전하여 준 모세가 앉는 자리이니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위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신적 권위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았는데 그들 스스로 앉는다는 말입니다. 스스로의 권위로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하고 요구하지만 자신들은 그대로 행하지 않는 위선적이며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말한다면 그것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들 스스로는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성령을 받지 못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지요. 성경을 알아도 머리로만, 지식적으로 알아서 말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영적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지키고 싶어도 안 되는 것이지요. 죄악을 멀리하고 주의 뜻에 순종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저희는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마 23:5) 하였습니다. 그들에게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모습이 아니라,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 까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유다서에서는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유 1:9)고 하였습니다. 여기 차고 다니는 경문(phylacteries)은 유대인들이 이마에 구약의 말씀 중 쉐마(신 6:4-9)를 적어 넣은 정사각형 모양의 통을 말합니다. 그것을 넓게 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이 경건한척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옷술(tassels)도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며 준행하고 방종케 하는 마음과 눈의 욕심을 쫓지 않게 하신 것인데(민 15:38-40), 그것을 크고 길게 하여 사람에게 보이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원래의 경문이나 옷술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이 세상에서 구별된 백성임을 기억하고 말씀을 준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민 15:39). 즉 이 외적인 것들은 속 사람을 위한, 삶의 참된 동기 등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저 자신들을 외적으로 경건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이들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46절)고 하신 것입니다. 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지도자입니다. 시장과 같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좋아하는 지도자입니다. 그저 문자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모임에서 자기 생각만이 가장 좋은 것으로 알고 주장하며 전혀 양보할 줄 모르는 지도자입니다.
또한,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47절)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부패하여 다른 사람을 짓밟는, 그것도 가난한 과부의 얼마 없는 재물을 등쳐 먹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를 도와야 할 텐데, 받을 것을 다 챙기는 것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외식으로 길게 한다고 지적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기도가 과부를 향한 그들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못된 행동을 감추려는 의도로 길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들이 과부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며 긍휼을 베풀어야 했는데, 오히려 얼마 갖고 있지 않은 재물을 삼키고는 죄책감으로 기도를 길게 하고 있으니 더 악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알고 있고, 기회가 많으면 그만큼 책임이 있는데, 그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니 더욱 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49절). 사실 구약성경에도 이런 자들을 저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빈핍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며 내 백성의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10:2)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미 6:8)이라고 하였는데, 정반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1-12)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영광을 누리게 될 영적 지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늘 함께 하시며 바라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합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말의 근원, 혹은 자원이 하나님 말씀이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함을 늘 기억합니다. 이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정말 참된 영적 지도자는 주님의 본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낮은 곳을 택합니다. 의지적으로 상석이 아니라, 종의 자리에 앉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종의 도를 가르치시기 위하여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저녁 식사를 하다가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른 후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가장 더러운 발을 손수 씻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2-17)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줄 수 있는 자가 참된 영적 지도자입니다. 복이 있는 자며, 참된 영광을 누리게 될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위대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학위가 많고, 무슨 상을 많이 받고, 높은 직위의 명칭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버린 예수님처럼 정말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 스스로 높여 보아야 하나님께서 낮추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스코틀랜드 목사였던 Andrew Bonar 가 말하기를 ‘나는 어떤 신자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신자인지 구별할 수 있는데, 그가 하는 말이 자신에 대한 말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더 많이 할 때다. 성숙한 신자는 아침에 해가 뜨면 사라지는 새벽 별처럼 자신이 점점 사라지는 사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공감하는 성경적인 말씀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초대 학장을 지낸 Thomas Shepherd 의 1642년 11월 10일 일기를 보면 ‘오늘 나는 개인적으로 금식을 하면서 복음의 충만한 영광을 보기 원했고,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교만을 없애고자 노력하였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역시 역사상 큰 사람들의 모습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을 죽이고 낮아지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21장에 이어서 위선적인 유대종교지도자들과 그들이 압제하는 가난한 과부를 대조하며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21:1-2) 하였습니다. 당시 성전의 연보 궤는 여인(이방인)의 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부자가 헌금하는 것도,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것도 다 보신 것입니다. 한 렙돈이 당시 노동자 하루의 임금인 한 데나리온의 약 백분의 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돈으로 약 $1.50 혹은 $2 정도인 것입니다.
그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3-4절)고 하셨습니다. 부자들은 풍부한 가운데 헌금을 했고 자신들을 위해 훨씬 더 많은 돈을 남겨두었으나, 과부는 극도로 가난한 가운데 먹을 것을 사야할 돈까지 전부 헌금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제 자기의 모든 생활을 하나님께 맡겨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리느냐 보다, ‘어떠한 마음자세로 드리느냐’에 있습니다. 헌금의 액수보다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과 믿음이 중요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며,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에게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도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돈과 명예는 이 세상 사탄 마귀가 잘 사용하는 무기들입니다. 인간이 이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거짓종교들이 이것들을 사용하여 인간들을 넘어뜨립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타락했던 로마 천주교가 면죄부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믿지 않고 죽은 영혼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황을 비롯하여 주교들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비용 등을 확보하기 위하여 성경에도 있지 않은 면죄부를 만들어 팔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항하여 루터가 1517년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95개 조항으로 면죄부가 비성경적임을 밝히는 바람에 온 유럽으로 종교개혁의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음 주일이 바로 이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이하는 주일입니다.
오늘날도 돈과 명예를 위하여 교회 안에서도 매관매직을 하는 타락한 모습이 있습니다. 교회 안의 직분이 세상의 직위처럼 생각을 하면서 무슨 높은 계급인양 생각하고 돈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 욕심에 이끌려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것으로 훗날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사실 여러분 모두는 어떤 면에서 지도자들입니다. 비록 무슨 명칭이나 직함은 없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 형, 오빠, 누나, 언니로서 지도자입니다. 사회에서는 직장 상사로서, 경영자로서 지도자입니다. 교회에서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평신도 어른으로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입니까? 지도자로서 대접을 받기 원하십니까? 사람들이 높여 주기를 원하십니까? 다 사라질 헛된 영광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사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도 아닌데, 어쩌면 내 스스로 권위를 세우며 주장하고 있습니까? 일구이언(一口二言)하며,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는 지도자입니까?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는 지도자입니까? 사람에게 인정받으며,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는 지도자입니까? 겸손하지 못하여 나 자신만을 내세우고 나타내기를 원하는 지도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 안에서 질서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 정직히 언행일치의 삶, 긍휼과 자비 베풀기를 좋아하는, 정말 용서하며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지도자입니까? 깊은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를 좋아하는 지도자로서 겸손히 낮아져 섬기는 지도자입니까? 은혜와 자비가 충만하고, 의지적인 자기 희생과 사랑이 충만한 지도자입니까? 우리의 주(Lord)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처럼 종의 도로 살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어느 누구보다도 더하기 원하며, 헌신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참된 영광, 영원히 누릴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이웃을, 우리 성도님들을 잘 섬길 수 있을까 애쓰며, 희생하며,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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