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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8-28 (일) 02:5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425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갈 4:12-20)


화장실에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하고 다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다 겪어 보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잘 변합니다.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이가 좋던 부부도, 친구도, 성도들도 한순간에 원수가 되는 것을 봅니다. 처음 마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게서 나느니라”(잠 4:23)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달라고 말입니다. 기도만 해서는 안되고, 말씀을 붙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성을 거스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선하고 좋은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1장부터 4장 11절까지 자신이 전한 순수한 복음이 아니라,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복음에 율법을 더하는 것은 다른 복음, 변질된 복음이라고 논리적으로, 교리적으로 설득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때가 되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하시고 완성하셨기에, 예수님의 피값으로 죄의 종으로 살던 우리를 풀어주어 자유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유업을 받게 되었고, 그 보증으로 성령님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1-11절). 그래서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로서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서는 분위기가 바뀝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며, 열정적으로 호소합니다. 이유는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12절)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후에 첫번째 선교여행에서 갈라디아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함으로 네 곳에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행 13:14-14:23). 그런데 그 때 바울의 상태가 최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습니다(행 14:19-20). 그런 상황에서도 복음 때문에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도 바울과 같이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를 거부함으로써 다시 자신과 같이 되기 바란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바울에게 해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참한 상태에도 바울을 이해하고 동정하였습니다. 업신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천사를 대하듯이, 또는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13-14절)라고 합니다. 처음 그들과 만날 때에 바울의 육체가 약했습니다. 정확하게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 않아서 추측할 뿐입니다. 돌아 맞아 거의 죽게 되어서 그의 모습은 도저히 볼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이 육체의 가시로 표현한 간질병이나 안질 때문에 고통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고후 12:7). 혹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열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목회자 혹은 전도자가 그런 모습이라면 교인들이 좋아할 수가 없겠지요. 바울도 그래서 13절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런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로 여기고 영접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이고 그의 가르침을 존중하였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섬겼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바울은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15절)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복음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잘 받고 너무 기뻐서 그들의 눈이라도 빼서 바울에게 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귀한 것이라도 기꺼이 드릴 정도로 바울을 사랑하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에 귀를 기울여 마음을 빼앗기다가 주는 자의 복을, 사랑을 베푸는 복을 저버렸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아니 원수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절)라고 합니다. 정말 가슴 아픈 고백입니다. 그렇게 좋던 관계가 왜 원수가 되었느냐 하면, 바울은 자신이 참된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른 소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신앙생활이 염려가 되어서 참된 말을 했는데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차갑게 했습니다. 바울과 원수되게 하였습니다.
그 말은 이미 1장에서부터 계속해서 한 이야기입니다. 복음에 율법의 행위를 더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신앙이 변질되었기에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 구약성경의 예를 들면서 설명을 했는데 그들이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울을 그냥 복음 전도자의 한 사람으로만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그의 할 일은 끝났고, 이제 모든 것을 자기들이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냥 전도자의 한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안수하여 세운 사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바울이 자기들이 하려는 것에 대하여 반대의사를 보이자 실망이 커지고, 미워하게 되어 원수처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니 하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무너지고, 교회를 헤치는 것에 대해 분명히 ‘NO’라고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고 한 것처럼,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주님의 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들이라도 진리의 길이 아닌 길로 가고 있음을 알면서 아무 말하지 않으면 주님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종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이어서 자신과 그들 사이를 원수지간으로 만든 자들의 의도를 지적합니다. 저희를 경계하라고 합니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17절)고 합니다. 물론 “저희”는 유대 율법주의자들, 거짓교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열심을 내면서 바울과 교인들 사이에 이간 붙여, 멀어지게 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들 편에 열심을 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열심을 내다(zhlo,w, be jealousy of)”는 ‘시기, 질투의 감정으로 가득하다’ ‘열렬히 바라다’ 라는 뜻으로, 교인들이 사랑하는 바울에 대한 시기, 질투로 이간질을 하여 자신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바로 믿고 있던 교인들을 흔들어서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간질을 하는 자를 저주하였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던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잘 믿으려고 하니까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열심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사탄 마귀가 있는 것이지요. 마귀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방해합니다. 복음 외에 딴 곳에 신경을 쓰고, 열심을 내게 합니다. 세상에 대한 유혹을 불러 일으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쓰게 합니다. 거짓에 속아 넘어가게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악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간질하여 교회와 멀어지게 합니다. 목회자와 멀어지게 합니다. 친한 성도들을 멀어지게 합니다.
바울은 그런 일이 아니라 좋은 일에 열심을 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합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 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8절)고 말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가는 곳에 열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좋은 일에 마음이 가야 하는데, 나쁜 일에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섭섭함, 시기와 질투, 거짓, 교만으로 인하여 믿음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됨을 깨려고 하는 공작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갈라집니다. 원수가 되게 합니다.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면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자신이 낳은 영적인 자녀들로 생각합니다. 처음에도, 지금도 그렇다고 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절) 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 거짓교사들과 달리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희미하기 때문에 자신과의 관계도 어그러졌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것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마치 에베소교회에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처음에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 그의 영적 자녀들이 되었는데, 다시 그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주안에서 아름답게 맺어진 관계가 어그러졌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책망하셨듯이(계 2:4-5) 주님과의 관계든지, 목회자와의 관계든지, 부자관계든지, 배우자와의 관계든지, 친구 관계든지 말입니다. 처음 마음으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끝으로 바울은 진솔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20절)! 자기 심정을 음성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그들을 찾아가서 함께 하면서 조용히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싶다고 합니다. 편지를 써서 보내는 심정은 격하지만, 실망으로 강경하게 이야기했다면, 만날 때에는 잔잔하게 영적 아비로서 말하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여기 “의심이 있다(avporou/mai, perplexed)”는 ‘당황하다, 어찌할 바 모르다’ 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원수로 아는 그들에 대해 당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의심이 간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직접 만나면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그들을 돌이키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함께 닮아 가기 원한다는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나요? 혹시 주위에 계신 분들과 처음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껄끄러운 관계가 되어 있거나, 서로 미워하며 원수처럼 지내지는 않나요? 특히 부부관계라든가 목회자와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교회 안의 영적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바울은 육체적으로 몹시 연약한 자신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에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영접해 주었음을 감사하며 회고하였습니다. 그들과 하나가 되어 예배를 드리고, 교제하고, 복음을 전하고 했었습니다.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 줄만큼 사랑하였었습니다. 그것이 참으로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지금은 마치 원수처럼 되었는지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참된 말을 했다고, 다른 복음 곧 비진리를 잘못이라고 말했다고 갈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교사들의 열심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속히 다시 가서 만나면 오해가 풀리고, 하나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과 하나가 된 성도는 주위의 성도들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었는데 관계를 깨뜨리려는 사탄 마귀의 궤계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무엇보다 참된 진리로 벗어나게 하려는 악한 영의 전략을 물리쳐야 합니다. 사랑과 신뢰를 저버리게 하는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라고 하였습니다. 때로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사랑합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를 끝까지 사랑으로 품으며,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려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예수님처럼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며 인자함으로 사랑하면 회복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에 낙심하지 말고 해산의 고통을 마땅히 감당하는 부모처럼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면 가정과 구역과 교회가 회복이 됩니다. 만약 회복이 안된 상태에서 천국에서 만나면 얼마나 불편할까요?
영국의 유명한 John Stott 목사님은 그의 갈라디아서 본문 주석에서 ‘교회는 그들의 목회자를 잘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잘 듣는 교인들이 필요합니다. 처음 마음으로 저를 비롯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려고 하는 목회자들이 필요합니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려는 교인들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해산의 수고를 하며, 다 함께 주님을 닮아 가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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