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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9-11 (일) 01:5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572    
자유를 주셨으니 (갈 5:1-12)



약 90여년 전에 남아공에서 어느 가난한 농부가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진흙에 파묻힌 달걀만한 726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때 당시 $315,000 이었으니 오늘날 가치로는 백만불 가까이 되는 귀한 보물이니 그것을 지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가격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주신 자유라는 선물입니다.  
지난 주일 살펴본 말씀의 결론,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4:31)고 한 것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언약의 백성들로서 자유하는 사라에게서 난 약속의 자녀가 그 기업을 이어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우리를 향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1절상)라고 하면서, 자유를 얻게 된 결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은 우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1절하)고 합니다. 이전에 종의 멍에, 쇠사슬에 묶여 살았으나, 주님의 은혜로 이제 풀렸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합니다. 참 자유를 얻은 후에 다시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굳게 서라(stand firm)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얼마든지 다시 노예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강제로 다시 노예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나 욕심에 끌려 종의 멍에를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의 할례의 멍에, 율법의 멍에를 쓰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런 멍에들에 매이게 되면 어떤 불행이 오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2절).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이 그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안 된다는 것은 어쩌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손해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할례라고 하는 것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인치실 때에 사용하신 방식입니다.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할례와 율법으로 인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보증으로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는 조건으로 그 몸에 할례를 행하게 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모세로 말미암은 언약이 깨어지고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언약이 파기된 지금 할례를 행하며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인 신약시대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시는 새 언약의 표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령으로 인치셔서(엡 1:13)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구원의 감격으로 주님을 따라가며 그 말씀을 실천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넘어가서,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인치심보다 눈에 보이는 할례를 받고 율법의 멍에를 매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할례나 율법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붙드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람의 중심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하셔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런 멍에들에 매이게 되면 유대교인들처럼 그 모든 율법과 규례를 다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3절). 얼마나 불행입니까? 그들이 모세오경에서 찾아낸 613가지의 규칙들을, 아니 모든 율법을 다 철저하게 지켜야 합니다. 다 외우고 기억하기도 힘들지만, 하나라도 실수하여 지키지 않으면 다 지키지 않은 것이 됩니다. 말 그대로 멍에입니다. 성령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무슨 규칙들 안에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셋째로, 다시 그런 멍에를 매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4절).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 하니, 자기의 의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니 당연히 그리스도와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물과 기름처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주의(legalism), 형식주의, 공로주의는 은혜와 거리가 너무 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 율법을 지키는 것 때문에 우리를 받으시고 자녀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무슨 할례를 행하며 율법의 멍에를 매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다른 여러 멍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과 관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무슨 서원을 해 놓고 그것이 멍에가 되어서 늘 마음에 부담이 된다든지, 스스로 어떤 종교 행위에 매인다든지, 자신이 교회 안에서 가장 신앙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겠다고 작정을 하고 애를 쓰는 것은 참 좋은데, 그렇게 하면서 자꾸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질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지기 싫어서, 또 시기와 질투심 때문에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성경도 많이 읽고 기도도 오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이 멍에가 될 수 밖에요. 이외에도 불필요한 멍에를 매고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삽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절)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죄나 그 어떤 멍에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으니 이제는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며, 믿음으로 살면서 마지막 날 우리를 완전한 의인으로 변하게 되는 소망을 기다리며 산다는 뜻입니다. 다음 주일에도 말씀드리겠지만, 자유(freedom)와 방종(indulgence)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내 육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다 하며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13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5절에 “기다린다”는 동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고 염려하면서 자꾸 옛 멍에를 붙드려고 하지 말고, 우리는 소망 가운데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눈과 눈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그날의 감격을 생각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그 시간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방종하며 살 수 있습니까? 자유함을 주신 믿음을 좇아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혼자 다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주시는 감동을 주시면 그것에 따라, 무슨 일이든지 기쁨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결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절)고 합니다.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표지)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는 말은 사람의 어떤 신분이나 지위가, 겉모습 등 이런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복음을 믿고, 그 믿음을 좇아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기에 사랑으로써 역사합니까? 우리는 죄인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이 하나님을 온전히 만족시키시며 기쁘게 하셨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무 공로 없어도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감사를,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큰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삶 전체는 빚을 진 것입니다. 사랑의 빚입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대로 위로는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며 옆으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아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려고 애씁니다(마 22:37-39, 요 13:34-35). 나의 삶 전체를 다 드려도 갚지 못할 사랑의 빚이기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삽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죄의 쇠사슬을 벗겨 주셔서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셨으니 나도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고 싶습니다. 주님을 향한 고마움과 사랑하는 마음은 여러분 자신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모든 멍에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셨음을 깨닫는 순간 그냥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고마워서 무엇인가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말기 암이라는 선고를 받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기를 듣고 낙심하고 있는데, 어느 분이 Harvard Medical Center 혹은 Johns Hopkins Hospital 그 암 치료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가장 유능한 전문의사를 소개하여 찾아가서 암을 고치게 되어 새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면 그 고쳐준 의사에게 얼마나 감사하며 남은 인생 무엇이라고 그 의사를 위해 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육신의 몸 전체를, 삶 전체를 드려서 주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시간과 건강을, 몸과 물질을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참 자유인입니다. 이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사람은 ‘내가 구원받았는지, 정말 죄의 멍에를 벗고 자유하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참 그리스도인들도 살다 보면 때로 이 감격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들으면서, 찬송을 부르다가, 혹은 경건의 시간을 하면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게 되면 이 감격이 다시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임을 생각하다가 주님의 놀라운 은혜가 다시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George Whitfield 목사님은 이 감격과 열정이 식을 때에 자신이 회심했던 교회로 찾아가 그 의자에 입맞추면서 부르짖고 회복하곤 했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그런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주님을 위해서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약 2:14-18).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사랑하는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바르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내 욕심대로 살면 사랑하는 주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6절에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좀 잘못한 사람이 있어도 용서하고 덮어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야 할 것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없습니다. 누가 어쩌다 나를 사랑으로 도와주면 참 고맙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었는데, 아무 말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괘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그렇지 않고 ‘나는 당신을 위하여 이만큼 애를 쓰는데, 주님을 위하여 모든 희생을 하고 있는데 당신은 하는 것이 무엇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사람을 좋아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라고 하신 것에 참 감사를 드립니다. 다 좋아하고 살기는 정말 힘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성령님을 의지하고 의지적으로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싫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이어서 율법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경고합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7-8절)고 합니다. 진리를 순종하지 않게 하여 넘어지게, 퇴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누룩의 비유를 들어,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절)고 합니다. 적은 무리가 교회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누룩을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마 16:6, 막 8:15).
하지만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게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줄 주안에서 확신한다고 합니다(10절). 다만 그렇게 누룩이 되어 온 교회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어서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1-12절)고 하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할례가 필요하다고 전했다면 유대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 즉 십자가 때문에 걸림이 되는 것이 그쳐버렸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공격적이 됩니다. 그들의 죄악된 마음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할례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종교적이기 때문에 잘 받아들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이루는 의를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누룩을 베어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받아주면 안됩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떤 멍에든지 다 자유하게 하셨음을 믿으십니까?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우리를 얽매려는 어떤 종류의 멍에도 다 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종의 멍에를 계속 매고 사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혀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조차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일부러 멍에를 만들어 다시 종살이를 하지 마십시오. 제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오히려 주신 자유를 가지고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달음질(race)입니다. 마라톤과 같습니다. 다시 만날 주님을 소망하면서 참고 기다리며, 사랑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셔서 사랑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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