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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9-18 (일) 03:0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504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갈 5:13-15)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셔서 어떤 멍에든지 다 자유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1절).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우리를 얽매려는 어떤 종류의 멍에도 다 풀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종의 멍에를 계속 매고 사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전혀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유(liberty)와 방종(indulgence)은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즉,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잔뜩 술에 취하여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때리며 발가벗고 떠들면서 이것이 그의 자유라고 한다면 다들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경찰이 그 사람이 법을 어겼다고 체포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자유를 빼앗았다고 말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즉, 자유라고 하는 것은 책임과 의무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이유는 그 자유로 주님을 예배하며, 섬기며, 사랑하며, 주님을 닮아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요 의무입니다. 마음껏 죄를 지으라고 자유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도 안되지요. 그렇게 살면 오히려 다시 죄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안에서의 자유이기 때문에 제한적입니다. 즉 참된 자유는 절제, 혹은 자제(restraints)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자유의 삶을 돕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선 바울은 그 제한적인 것들, 우리가 자제해야 하는 것들을 설명합니다. 13절 하반절에서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하였습니다. 여기 “육체(flesh)”는 우리 몸, 뼈나 근육 이런 것 말하는 것 아닙니다. 타락한 육체, 죄의 성향을 말합니다. 즉 허락하신 자유로 죄성을 따라 정욕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절)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도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고 하였습니다. 동일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죄성이 다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다스리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이는 누구를 섬기느냐는 이슈입니다. 주님을 섬기느냐, 나를 섬기느냐? 주님에게 순종하느냐, 내 육체의 정욕에 순종하느냐?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느냐, 죄성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느냐? 우리는 매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성령의 음성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고 하셨듯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멘!

바울은 한 예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착취하거나 학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물다(bite)”는 동사는 짐승이 물어서 상처를 내고 고통을 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은유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다, 상처를 주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먹는다(eat up)”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삼킨다’라는 의미로, 맹수들이 약한 짐승을 잡아 먹는 잔인한 행동을 뜻합니다. 아마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서로 그렇게 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경고하였겠지요.
내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내 먹잇감 대하듯이, 혹은 물건 대하듯이 하면,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다 멸망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서로 물고 뜯으면 서로 괴로울 뿐입니다. 자기 손해입니다. 사탄 마귀만 좋아할 일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14절)라고 하였듯이, 상대방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율법 중 가장 최고의 계명이 무엇인지 율법사가 물었을 때에, 신명기 6장 5절과 레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대답하신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율법 가운데 도덕법(moral law)인 십계명을 요약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즉, 온 율법의 가르침을 집약하면 이 두 명령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약의 계명은 신약에 들어와 새 계명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너희도 서로 더러운 발을 씻겨 주라고 하시고, 첫 성찬식을 제정하신 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신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라, 희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만 위해 짐승처럼 서로 물고 먹는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며,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다른 형제와 자매를 이용한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당연히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한 것처럼, 사랑하며 상대방의 종처럼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정말 귀한 것임을 알고 자기 마음대로 자유를 쓰지 않고, 얼마든지 자제하면서 스스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고난 중에 믿음을 지키며 살려고 하는 디아스포라 성도들에게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6-17)고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였습니다. 김서택 목사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복음은 개인의 가치를 돌려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소중하며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권리가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자유를 맛보고 어떻게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가치도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내 마음대로 죄를 짓고 살아도 다 용서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방종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이 6개월 밖에 없다면 그 6개월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내 마음대로 흥청망청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사람은 생명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짐승과 다름이 없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면, 화인 맞은 양심이 아니라면, 남은 삶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생각하며 소중하고 보람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수명은 제한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저 기회가 있는대로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하여 삽니다. 주어진 시간을 그저 돈을 버는 일에 다 보냅니다. 그렇게 벌어 놓은 돈을 자신은 쓸 시간도 없습니다. 그렇다가 몸이 망가져 병치레 하다가 벌어 놓은 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마냥 사는 인생이 아닌데, 70년 길어야 80년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남은 생명도 길어야 몇 십년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생명이 얼마나 귀한 줄 알면, 그냥 막 살지 않습니다. 그 은혜 감사하여 주님을 위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며 살 것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기 위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생활철학,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세심하게 배려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내용은 로마교회 안에 믿음이 강한 사람은 우상 앞에 제사를 드린 음식이라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은 죽은 신이고, 음식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연약한 자가 어떻게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음식을 먹느냐고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음식을 먹는 자는 먹지 못하는 자를 업신여기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자를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6절하)고 하였습니다. 다들 주님을 위하여 먹기도 하고, 먹지 않기도 하는데 왜 형제를 업신여기거나 판단하느냐, 나중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롬 14:10).
중요한 것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자유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삶의 동기,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가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라면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말은 ‘주를 위하여’ 해놓고는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이 강하다는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할 때 자주 ‘주를 위하여’ 한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주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상대방도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종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내 양심상 옳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것인지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배려해서 하는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만 주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주님을 위하여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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