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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11-06 (일) 06:4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351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라 (갈 5:26-6:5)


우리 믿는 자들은 관계(relationship)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과의 관계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 부딪히는 사람들과의 대인관계를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주위에 있는 분들과 관계를 좋게 유지하지를 못합니다. 불신자이든 신자이든 말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걸림돌이 됩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보아야 하고, 자신의 마음, 태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겸손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믿는 자들은 열등감(inferiority)이 있어서는 안되고, 우월감(superiority)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열등감이든, 우월감이든 다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자아(ego)가 살아 있어서 그렇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이니 자긍심을 가지고 자신이 존귀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또한 다른 성도들도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하고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안그러면 형제, 자매를 비판하게 됩니다.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 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1-3)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자신이 다른 성도들보다 우월하다는 자기 의를 내세우며 헛된 영광,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다른 성도들보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헛된 영광을 추구하여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합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5:26)고 합니다. 여기 ‘격동하다(prokale,w, provoke)’는 단어는 경쟁하며 다투는 것을 뜻합니다. 옆의 사람들과 비교하면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깔보면서 자극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투기하다(fqone,w, envy)’는 반대로 자신이 열등하니까 시기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이 나는 없는데 그것을 갖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품이든, 외모이든, 물질이든, 명예이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다 대인관계가 좋을 리 없습니다. 다 자기(이름)을 내세우려는 헛된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는다 하면서 잘난 체하며 인정받기 원하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자기 영광을 내려 놓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생기는 이유는 다 자신이 죄인임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롬 3:23; 5:12).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 주시지만, 아직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서 때로 죄를 짓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하였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여전히 죄인이라는 이 진리를 알면 우월감도, 열등감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옆에 있는 사람들을 우월감을 가지고 격동하거나 열등감으로 투기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6:1)고 하였습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누가 무슨 죄를 지은 일이 드러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체로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은 금방 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엄청 화를 내면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비난합니다. 그 이면에는 나는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은연 중에 자기를 나타내고 싶은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누가복음 18:10-13절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아니면 그냥 덮고 넘어가자는 분들도 있습니다. 죄를 들추어 내면 좋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공개적으로 노출이 되면 다 어렵게 되니까 쉬쉬하면서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 둘 다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아무나 그런 자를 바로 잡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령한(spiritual)’ 너희가 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 신령하다는 말은 5장 16절부터 24절에서 언급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령의 열매가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성령충만한, 성숙한 성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성령의 열매가 없는, 성령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사람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째로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에도 있는 온유함(gentleness, meekness)입니다. 겸손한 마음의 부드러운 말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우월감으로, 내가 더 신앙이 좋다는 교만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바로 잘 세울 수 없습니다. 여기 ‘바로잡으라’는 뜻처럼, 회개하여 돌이키고 회복하도록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1:29). 셋째로, 신령한 자도 자신을 돌아보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나도 얼마든지 그런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까 겁을 내야 합니다. 죄의 위험성을 공감해야 합니다. 병원에 가면 병균(바이러스)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중환자실에는 아무나 출입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가족들이 면회할 때에도 특별히 신경을 쓰고 가운을 입는다든가, 유리 등으로 막아 놓고 보아야 합니다. 이유는 그곳에 병균(바이러스)가 득실거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어갈 때에나 나올 때 손을 소독하지 않습니까? 교회라고 해서 죄가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말과 행동에 죄의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면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런 죄를 짓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범죄한 사람을 보고 실망할 필요도 없고, 자신은 절대로 그런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넷째로, 서로 짐을 져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고 하였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태도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웃사랑으로 무거운 죄짐을 함께 지면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여 돌이키면 얼마든지 받아주는 것입니다. 아니 회개할 수 있도록 짐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비슷한 죄를 짓고 용서함 받은 은혜를 나누면서 말입니다. 물에 빠진(죄 지은) 사람을 건져주어야 하는데, 자신이 물에 빠졌다가 (죄를 지었다가) 건짐을 받은 사람만이 더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법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3-14) 말씀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3절)고 합니다. 자신이 대단한 줄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갈 길이 먼 자들입니다. 공사중(under construction) 입니다. 성화의 길은 한참 가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입니다. 물론 포도나무이신 주님에게 붙어있는 가지라면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입니다(요 15:5). 그래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4-5절)라고 하였습니다. 즉 신령한 자로서 범죄자를 바로잡으려면 다섯째로, 우선 자기의 일을 살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일들을 잘 하고 있는지,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매일 살펴야 합니다. 잘못하고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그런 성도가 자기 자신에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을, 자긍심을 갖는 것입니다. 남에게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종으로서 당연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눅 17:10)고 하셨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짐을 지는 당연한 것을 하고 남에게 자랑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당연한 일을 잘 감당하고도 주님에게는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자긍심과 교만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히 온유하게 다른 사람의 일을 돕고, 사랑으로 짐을 함께 지기는 하지만 각자 자기의 짐(backpack)을 잘 지고 가야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에 섰을 때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회계를 해야 합니다(고후 5:10).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John Stott 목사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우리가 함께 질 수 없는 짐이 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계산해야 할 우리의 책임이다. 그 날에 당신이 내 짐을 져줄 수 없고, 나도 당신의 짐을 져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져야 할 짐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 주신 것들 말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녀로서, 부모로서,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평신도로서, 직장인으로서, 경영인으로서, 학생으로서, 교사로서, 시민으로서, 기타 등등 말입니다. 이렇게 각자에게 특별하게 주어진 책임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 아무리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 서로 힘을 합해 도울 수 있습니다. 각자의 책임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잘 하지 못했다면, 죄를 회개하고 고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대인관계는 어떠합니까? 자꾸 가까운 사람들과 다투십니까? 주위 분들과 껄끄러운 관계로 서로 마음이 불편합니까? 만약 내일 우리 주님이 재림하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셔서 그 분들을 다 만난다고 하면 주님 앞에서도 그렇게 서먹서먹하게 지내시겠습니까?
우선은 자신과 하나님과 관계가 친밀한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 혹시 내 안에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있는지 점검하시고 그것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아니면 계속 죄를 짓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게 되거나, 시기 질투를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안됩니다. 대신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그의 자녀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나 한 사람 때문에 그 아들 예수님이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영원히 사함을 받게 되었고, 오늘도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은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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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우리 중에 누가 죄를 짓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회복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첫째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자가 해야 한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둘째로, 온유한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셋째로, 자신도 돌아보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나도 죄인이니 얼마든지 그런 죄를, 아니면 다른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사탄 마귀가 유혹하면 넘어질까 겁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넷째로, 서로 짐을 나눠지라고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지 말고, 다른 사람중심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가 죄로 말미암아 고통 중에 있을 때 나도 이전에 죄로 고통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들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일을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말고 주제를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고유한 짐들은 내가 나중에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회계를 해야 할 짐들이라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결국 자신 스스로 궁극적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삶을 살려면 앞서 언급하였듯이 주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주님의 손을 꼭 잡고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이 나를 온전히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도 살고, 죄를 지은 자도 살게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삼아 주셨는데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가지고, 발전시켜 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공동체)가 살기 때문입니다.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는 부흥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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