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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3-02-26 (일) 02:4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693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요일 3:10-18)
때때로 주위 사람들 중에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너무 착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도 피해나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모에게 온 정성으로 효도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남편이나 아내를 일편단심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반드시 무엇이라도 자기 것을 주어야 하는 사람, 자녀를 입양하여 키우면서 친 자식들에 못지 않게 희생적으로 키우는 사람, 자신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사람조차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사람, 자신의 목숨도 마다하고 물에 빠진 사람이나 불이 난 집에 들어가서 구해주는 사람, 친구와 맺은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신실하게 잘 지키는 사람, 아무리 힘들어도, 피곤해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 등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 주위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이유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드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그런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지난 2000여년 동안 우리 예수님을 수많은 제자들이 따랐던 이유도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라는 놀라운 사랑을 베푸셨기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제자들이 주님을 닮아 그렇게 사랑하고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다음 세대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 믿는 자들은 계속 죄 가운데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요일 3:4-9). 습관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1) 죄는 하나님의 법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아무 소용이 없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의 씨, 곧 말씀과 성령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알고, 훗날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때를 소망한다면 그렇게 죄 가운데 살 수 없지요(요일 3:1-3).
그리고는 오늘 본문 10절 이하에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마귀의 자녀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있다고 합니다. 바울도 이 세상 사람은 죄의 종이거나 의의 종 둘 중에 하나이지 중간은 없다고 하였습니다(롬 6:16).
그러면서 마귀의 자녀들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10절하)고 합니다. 그 안에 타락한 죄성만 있지, 하나님의 의가 없기에 당연히 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미워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가인의 예를 듭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12절)고 하였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지만, 하나는 마귀의 자녀이었기에 마귀의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였기에 하나님의 성품과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자녀이었던 가인은 아우의 행위가 의로웠기에 시기와 질투로 동생 아벨을 미워하여 죽이고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마귀의 자녀들은 남이 잘되면 미워하고, 자기 욕망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미워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곧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를 미워한다고 합니다(요일 3:13).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마귀의 자녀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연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믿는 자들이 마귀의 자녀들과 크게 다른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14절)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가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사람들의 특징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11절)고 한 것처럼, 우리 믿는 자들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 곧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 상에서 죽게 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서 뜨거워지고,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자존감이 생기게 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이 자존감이 없으면 제대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이 믿는 자들에 있어야 할 삶의 표시(mark)임을 종종 말씀하셨습니다(마 22:34-40; 요 13:34-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5)!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사랑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그냥 사망에 거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5절)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인의 경우도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미워할 때 친 형제조차에게도 어느 정도까지 악하게 행동하게 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누구를 미워하면 어떻게 됩니까? 단순히 한번 미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의 가족들도 싫어하게 됩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을 다 싫어하게 됩니다. 너무 싫은 나머지 그 사람이 죽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입니다. 기회가 되면 죽이기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참된 성도는 어떠합니까? 잠깐 미워하는 감정이 생겨도 이는 자신의 죄성이 발동하는 줄 여기고 돌이켜서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에게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해서 상처를 준 사람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잘 모르고 그렇게 했거나 그 사람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그렇게 했다고 여깁니다. 즉 내가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 배후에 악한 마귀가 장난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마귀를 미워하지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잘못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을 알기에, 내 인생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생도 소중함을 압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또 사랑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사랑을 알기 전에는 내 식으로,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조건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을 알게 된 후에는 그 사랑을 본받아 하기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줍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추하고 못난 벌레 같은 인생을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목숨까지 주신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절)고 하였습니다. 여기 “알고”의 뜻은 피상적인 앎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경험적인 앎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그냥 인정하고 받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 형제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니 본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은커녕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에 무엇을 나누는 것조차 힘들어 한다면 정말 영생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 그 안에 하나님 사랑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17절)라고 한 것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 사랑이 있는 자라면, 영생을 소유한 자라면, 하나님의 친 자녀라면 옆에 있는 형제, 자매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도와줄 마음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 사랑이 없는 자, 하나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러고도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죽은 믿음이라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6-17)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목숨은커녕 조금도 희생하지 않으려는 교인들이 있기에,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사랑의 말도 필요합니다.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 주셔야 합니다. 표현이 안 되는 사랑은 진실이 아닙니다. 다만 말로만 표현한다면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로만 사랑한다는 자체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을 말로만 합니까?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악한 말, 비방, 중상모략의 말 보다는 낫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러나 거기서만 머문다면 고인 물이 시간이 지나면 썩어져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시간이 지나면 실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며 악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여기 18절에 “행함(in action)”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주면서, 입을 것이 없으면 입을 것을 주면서, 거할 곳이 없으면 거할 곳을 마련해 주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역동성이 있는 사랑의 표현을 말합니다. “진실함(in truth)”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내면의 질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진지함, 진솔함, 꾸미지 않는, 위선적이지 않은 사랑을 말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속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가면을 쓰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원하지는 않지만 사람들 눈치 때문에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초대교회 당시 로마제국의 Traianus 황제(주후 98년-117년) 때 소아시아 비두니아 총독이었던 Plini 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런 내용의 편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황제시여! 저는 부하 몇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위장해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부하들에게 거짓으로 세례를 받게 하고 그리스도인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게 했습니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밤낮 모일 때마다 그들의 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다고 합니다. 또 자주 빵을 나누어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황제시여! 그들은 로마의 관리들과 황제 폐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의 눈에 비추어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그런 사랑이라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교인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감동을, 하나님 마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저절로 사람들은 감동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사로서 위기감을 느낍니다. 이런 행함과 진실한 사랑이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흐르지 않는 고인 물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물이 썩어져 한 마리 물고기도 살 수 없는 연못이 될 것입니다. 누가 새 물고기를 잡아서 갖다 넣어도 살 수가 없는 연못 말입니다. [설교요약]
하나님의 자녀들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우리 모두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이전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곧 관심입니다. 형제, 자매에 대한 배려입니다. 많이 사랑하지 못해도 최소한의 사랑은 나타내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말은 물론 그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원합니다. 진실한 사랑이 나타나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심어졌다고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사랑으로 사랑하면 그러면 전도도 저절로 된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랑에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슨 보상을 기대하고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보상을 기대하고 원하셨다면 시작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상 진실하고, 신실하게,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런 사랑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면, 우리도 어떤 대가나 보상을 기대하고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삶이 좀 힘들어도 인상 쓰거나 짜증내지 말고 웃으며 서로에게 인사를 나눕시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깁시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좀 주의해서 말합시다. 상대방에게 사랑할만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에게 그것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집니다. 그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을 덮고도 남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 가능하면 상대방을 이해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굳은 마음도 녹아 내릴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렇게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가 정말 말로만 사랑이 충만한 교회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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