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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4-01-18 (목) 09:06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136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 1:22-30)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으로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그렇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죽는 순간에 두려움보다 평안 가운데 오히려 기뻐하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앞 문맥(12절-21절)에서 사느냐 죽느냐는 하나님 소관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오늘 그리고 내일을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사느냐’ 인데, 바로 자신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면서 그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에 남은 인생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21절)고 고백하였습니다.
즉 1) 바울이 사는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고 한 것처럼, 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었고, 만약 죽게 되면 죽음을 통해서도 주님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다 주님의 은혜이기에,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주님의 뜻이며, 죽음을 통하여 유익을 끼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선택할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22절)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딜레마가 있는데, 죽어서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영원히 사는 것도 좋은데, 육신으로 살면서 계속 사역의 열매를 내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시위대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자로서 죽어도 좋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서신을 쓴 후 바울은 약 5년 후에 순교합니다. 즉 바울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이나 미련이 없습니다. 죽음 이후에 주님과 함께 있으며 주어질 축복을 생각하니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한편 자신의 사역으로 많은 제자들을 세우고, 격려하며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열매를 거두는 것도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뜻대로, 주님이 원하는 대로 살며 삶 속에서 열매를 거두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즉, 그의 사역 가운데 복음의 열매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느냐, 사느냐 무엇을 선택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이 어떤 것을 더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23-24절)고 합니다. 죽으면 더 이상 핍박과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바램이 더욱 좋지만, 만약 산다고 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영적 자녀들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기쁨)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5-26절)고 한 것입니다. 물론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감옥에서 나와서 다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으나, 그 때까지 이렇게 서신을 통해 권면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27절상)고 명령합니다.
여기 ‘너희는 합당하게 생활하라’의 원어(πολιτεύεσθε)는 한 단어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행동하라’ 입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 시민의식을 가지고,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의 명사형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고 한 ‘시민권’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의무는 하나님 나라 시민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하나님 나라 시민답게 사는 것일까요? 본문 27절에 이어서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만나게 되어 볼 수 있든지,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든지 그들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하는데, 첫째로, 일심으로(one spirit), 한 뜻(one mind)으로 함께 하라(stay together)고 합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고 한 것처럼, 성령이 하나이니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굳게 서서, 우리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서로 많이 다르지만 하모니를 이루는 것입니다. 한 가지 목적으로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불평, 비방, 가십, 분쟁 등 하나됨을 깨는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을, 독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열시키려는 것이 사탄 마귀의 주특기입니다. 그런 것들을 저항하며(resist), 오히려 교회를 화평하게 하는, 건강하게 하는 성령의 백신을 맞아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마음, 한 뜻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둘째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합니다. 27절 하반절에 ‘협력하다 (συναθλοῦντες, strive together)’는 두 단어(함께+운동하다)의 합성어로서 운동선수가 경기를 하는데 함께 Teamwork을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축구를 하든, 배구를 하든 단체경기에서 서로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어 승리하도록, 마지막까지 경기를 잘 치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함께 서서 대적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28절상)고 하였습니다. 27절과 28절은 한 문장입니다. 사탄 마귀가 공격한다 하더라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함께 물리치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기쁨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아, 우리가 하나님 나라 시민들이 맞구나. 하나님의 군대이니 사탄이 공격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자부심으로 능히 맞서야 합니다.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28절하)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경기를 하면서, 싸움을 하면서 어려움이,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29-30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되며, 그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고 은혜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장 2장 1-4절을 살펴보면, 문맥상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난은 거창한 순교와 같은 고난이 아니라, 서로 복닥거리며 함께하는 교회 생활에서의 섬김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실생활에서 교회를 섬기다가, 성도들을 섬기다가 부딪치는 고난입니다. ‘믿음 때문에 순교할 것이냐 아니면 살려고 주님을 버릴 것이냐’ 이런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열심히 하다가 부딪치는 교회 생활,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겪는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게으르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 것이냐 아니면 좀 힘들더라도 내가 감당해야 할 섬김의 의무를 다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은혜를 이야기할 때에 늘 고난을 함께 거론합니다. 이유는 받은 은혜에는 반드시 소명(Calling)이 포함되고, 소명은 충성된 삶을 요구하고, 충성된 삶은 구체적인 고난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자가 자기 소명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불행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참고 인내하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을 맛보게 되어있습니다. 이유는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잘 깨닫고 보람을 느낄 때에 비로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 그 의미와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그저 고통스러울 뿐이지만, 그 은혜 안에 사는 사람에게는 고난도 하나님을 경험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고난을 피함으로써 행복을 얻고자 하지 말고, 고난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붙들고 섬김으로써 그 고난 속에 깃든 놀라운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고난을 받아왔고, 고난을 받는 성도들을 보고 들었다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전쟁을 하면서 하나도 다치지 않고 이기겠습니까?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고 하였고, 이어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18절) 하였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바울처럼, 먼저간 신앙의 선배들처럼 죽어도 좋습니까? 주님을 만나기 때문에, 영광의 상급이 기다리고 있기에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환란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 아직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까?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의 열매를 기대합니까? 바울은 죽어도 좋지만, 살아도 좋은 것이 복음의 열매 때문이었습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삶의 나누고, 본을 보이고 해서 그들에게서 복음의 열매를 보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권면하며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명령합니다. 1) 일심으로, 한 뜻으로 함께 하라고 하였습니다. Stay together with one spirit and mind. 2)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하였습니다. Teamwork 이 잘 되어, 하모니를 이루어 함께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Strive together with teamwork for the faith of gospel. 3) 함께 서서 대적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Stand together without fear against the opposition.

사랑하는 여러분!
경기에서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사소통(communication)입니다. 만약 대화가 단절되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 경기를 잘 치를 수가 없습니다. 전쟁에서 통신이 두절되면 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적들이 에워싸도 통신이 된다면 본부에서 지원군이 도울 수 있습니다. 바울의 옥중서신을 살펴보면 그가 감옥에 갇혔어도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골로새교회 등과 의사소통이 가능했기에,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든지 서신을 통해 권면을 하며, 기도제목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의사소통이 되었기에 서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효과적으로 일하며,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결국 300여년 만에 온 로마제국을 복음화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힘들 때 자주 만나야 합니다. 서로 피하면 어떻게 하나되어 대적을 이기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거의 비슷한 문제로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서로 더 마음이 통하여 위하며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따로 놀면 안됩니다. 가능하면 공동체 모두와, 많은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함께 해야 합니다. 한 목적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끝까지 좋은 Teamwork으로, 하모니를 이루어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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