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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4-08-04 (일) 08:35
분 류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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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37    
믿지 않음을 인하여 (막 6:1-6)



우리 주위에는 아무리 전도를 해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가족이나 친지들 가운데 그런 분들이 있으면 너무 안타깝고 슬프지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예수께서 배척당하시는 장면 속에 돌밭과도 같은 마음의 그들에게 예수님은 걸림돌이 되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앞으로 계속해서 신앙의 힘과 불신앙의 힘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신앙의 힘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다니엘, 로마 백부장, 야이로, 바울,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불신앙의 힘도 만만치 않게 나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 애굽의 바로왕, 광야 생활에서와 분열왕국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 느부갓네살 왕,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 대부분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과 바울이 전도하려 했던 아구스도나 아그립바 등 말입니다. 믿음이 죄 사함과 영생을 주는 능력이 있듯이, 불신앙은 사람을 죄 가운데 영원한 지옥으로 심판하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행복, 기쁨, 평안, 영광을 가져다 주듯이, 불신앙은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불행, 슬픔, 불안과 고통을 가져 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보았듯이 불신앙이 죄로 인하여 굳어진 마음에서 비롯되었든지, 아니면 피상적인 믿음으로 얕은 돌밭 같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든지, 아니면 세상 정욕에 의하여 진리를 가로막은 가시떨기 같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든지 간에 모든 불신앙은 본인의 지성, 마음, 의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신 수많은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복음에 대하여 ‘NO’를 선택한 것입니다.

1절에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고 합니다. 거라사인들의 데가볼리를 떠나 다시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신 주님께서 거기를 떠나시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곳 가버나움에서 주님의 주옥 같은 말씀을 들었고, 그 능력을 본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많은 말씀과 능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그들이었기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마 11:23) 이미 저주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 가버나움을 지금 떠나시는 주님은 다시는 그곳에 들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나사렛으로 돌아 가십니다. 아시다시피 요셉과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안고 애굽에서 돌아와 살던 어릴 적 고향입니다(마 2:23). 거기서 주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도 받으셨고, 마귀에게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30세가 되셔서 공생애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에도 고향 사람들에게서 배척을 당하신 사실을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3:31-35; 눅 4:14-23). 그때에도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과 악한 모습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있듯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눈으로 즐기기 만을 원하며, 능력을 힘입어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기는 하였어도, 죄에 대한 지적과 구원에 관한 메시지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불신앙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로, 불신앙은 명백한 사실에도 눈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 눈을 가리우는 것입니다.
나사렛에 도착한 예수님은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2절)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그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들었고 보았습니다. 놀랐습니다. 메시아임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이 분명함에도 ‘어디서 이런 것(지혜와 권능) 을 얻었느뇨’ 라고 묻고 있습니다. 공생애 사역 초기에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다가, 이제 약 일년 정도 지난 다음 또 듣고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랄 뿐, 이렇게 또다시 의심합니다.
그 동안 주님께서는 생명과 죽음, 시간과 그 영원성, 진리와 거짓, 의와 죄, 하나님과 사람,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놀라운 말씀들로 하늘의 지혜를 나타내셨고 가르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생, 예배, 전도, 죄, 구원, 도덕, 이혼, 살인, 섬김, 교만, 사랑, 미움, 분노, 질투, 위선, 기도, 금식, 참 교리(선지자)와 거짓 교리(선지자), 안식일, 율법, 제자도, 하나님의 은혜, 주의 이름을 훼방함, 이적, 겸손, 자신을 부인, 하나님께 순종 등 많은 주제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질병과 마귀들을 쫓아 내며, 지난 주일 살펴보았듯이 죽은 자도 살리시는 초자연적인 능력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아임을 믿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그런 말씀이나 능력을 보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 고향의 회당 사람들도 의지적으로 믿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불신앙의 힘입니다. 복음의 씨앗이 죄를 사랑하는 굳은 마음에 떨어져서 조금도 뚫고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거시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8-19)고 하신 예수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지 않는 것은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냥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냥 죄 가운데 계속 살기 위하여 용서받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보다 그 자신의 길을 가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증거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불신앙으로 주님을 의지적으로 거절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진리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단들이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명백한 진리를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는 것은 그의 불신앙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주께서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리라"(눅 16:31)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로, 불신앙은 전혀 상관없는 것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3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드러난 명백하고도 엄청나게 많은 사실이나, 그 증거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사렛 사람들은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주님과 함께 자라난 그들로서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런 인간적인 배경이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되어진 메시아가 이 땅 어디에서, 어느 가족에게서 태어나야 하고, 어느 공동체에서 자라나야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함께 자기들과 자라난 나사렛 예수님을 택하셔서 메시아로 삼으심을 마리아처럼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할텐데(눅 1:48), 그들은 의심하고, 질투하고,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이웃집 청소년이었던 동네 사람의 위대함을 믿지 못했습니다. 설마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마리아의 아들” 이라 함은 이 때 요셉이 죽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문화는 어머니의 아들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로 밝히기 때문입니다. 또는, 태어날 때의 일을 아는지 세상적으로 혼외 관계로 나은 불법적인 아들로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장남이었기에 요셉이 죽고 난 후 가정을 돌보아야 하는데 집을 떠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그 의무를 저버렸다는 생각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늘의 신적인 특권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셔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신앙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눈을 막았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 “배척한다(take offense)” 단어 원어의 뜻은 ‘넘어뜨리게 공격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단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물리친다, 거리끼기 때문에 넘어뜨린다는 말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라고, 선포한 것처럼 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딱딱하고 굳어진 마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갈아져서 그의 죄를 고백하고 버릴 때까지는 복음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 나사렛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별 상관이 없는 작은 문제들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서 믿지 않는 것을 봅니다. 전도하는 사람의 태도를 싫어 한다든지, 대부분의 교회 신자들이 위선자라든지, 목사가 너무 말이 많다든지 혹 너무 말이 없다든지, 예배가 너무 형식적이라든지, 아니면 너무 자유롭다든지, 하여튼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신자들이 어쩌다가 저지르는 실수를 트집 잡으며 진리이신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믿지 않으려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불신앙이 쓰는 가면입니다. 자신을 기만하는 표시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그저 목수요, 평범한 가족들을 둔 어릴 때에 알던 사람이었기에 배척합니다. 불신앙입니다.

셋째로, 불신앙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막습니다. 당연하지요!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4-5절)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잘 알려진 격언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과거 구약의 참된 선지자들이 종종 모욕을 당하며 메시지를 거부당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아무 능력도 행할 수가 없고, 몇몇 병자들만 고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배척하는 불신앙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 동네 사람들의 불신앙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 예수님은 때로 은혜 받을 자의 믿음에 관계없이 능력을 베풀며 고쳐 주신 적이 있습니다.  헌데 여기서는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번 보고 듣고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접했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내신 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 구원을 가져오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듯이, 불신앙은 그의 능력을 막고, 그 축복의 강물을 막는 둑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은 불신자들은 귀한 진리와 하나님의 축복을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진리와 하나님의 일반 은총까지 사용하여 주님을 배척합니다. 믿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능력이, 기적이 전혀 영적 가치를 못 가지기에 예수님께서 그 능력을 베푸시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눈요기로, 호기심을 채우시려고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의 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아쉬워서 그 능력을 나타냅니까? 이미 보여 주었어도 믿지를 않는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불신앙의 몇 가지 특징을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1) 아무리 증거가 명백해도 눈을 의지적으로 가리우는 것이었습니다. 2) 별 상관없는 것으로 핑계나 트집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능력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그래도 포기하지는 맙시다. 이유는 누가 택함을 입은 사람인지는 하나님 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그들이 마음이 딱딱하고 굳어져서 불신앙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때가 되면 돌아오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사용하여 그들이 돌아온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축복을 모르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기도와 노력으로 인하여 굳어진 마음이 녹아지며 열려진다면, 영의 눈이 떠진다면, 여러분의 은사와 받은 축복으로 회심(회개)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여러분의 끊임없는 사랑으로 결국 돌아온다면, 불신앙이 신앙으로 변하여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며,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겠습니까? 잃어버린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까(눅 15장)?
혹시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사명인데, 우리의 책임인데 너무 쉽게 잃어버리며, 감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 마음에 어떤 사람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신다면, 계속 성령께서 관심을 갖게 하신다면 주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인 줄 믿습니다. 눈물 흘리며 마귀와 싸우면서 계속 씨를 뿌릴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랑의 물을 주고 비료를 줄 사명은 우리의 것입니다. 열매를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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