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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4-08-25 (일) 10:31
분 류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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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35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의 능력 (막 6:30-44)




여러분은 과거에 주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신 경험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힘들지만 그 때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주님께서 세밀하게 우리를 돌보시는 것을 느끼고 사시는 분들은 믿음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리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온전히 주님을 신뢰해야 하겠지요.

오늘 본문의 문맥은 약 1년 반 넘게 가까이 옆에서 12제자들을 훈련시키시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며 유다 지역으로 단기선교를 보내시고(6:7-12) 난 후, 그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단기선교 보고를 하자(30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31절)고 마가는 기록합니다. 이에 그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가버나움에서 북동쪽으로 약 6마일 떨어진 좀 한적한 곳 벳세다라는 마을로 가셨습니다(32절, 눅 9:10). 바로 빌립과 안드레, 베드로의 고향입니다(요 1:44, 12:21). 아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몇 주간 단기선교를 다녀와서 피곤한 줄 아시고 한적한 곳에서 쉬고 먹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데리고 가셨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쁜 사역에서 좀 쉬고 싶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까지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고 주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도보로 갔다고 합니다(33절). 또다시 큰 무리를 만났는데 쉬지도 못하시고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가지 가르치셨습니다(34절). 양만큼 목자를 의존하는 짐승도 없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방황하게 되며,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스스로 지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 같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 “불쌍히 여기다”는 단어는 우리 말의 애끓는 심정, 열정(compassion)을 뜻합니다.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자신이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열정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좀 쉬고 싶은데 누가 찾아오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아 짜증을 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사랑으로 다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열정적인 사랑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정을, 관심을 갖고 사랑하며 돌보시기 원합니다. 특별히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병자를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던 분이셨습니다. 꼭 고쳐 주셔야 했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베푸는 작은 동정(sympathy)은 있을지 몰라도 열정(compassion)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릅니다. 특별히 아프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시기 원합니다. 때로 우리의 가족이나, 친구들도 자기 자신들이나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신경을 쓰고 있어서 우리의 문제에는 관심과 열정을 보일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필요를 아뢰어야 합니다.
심지어 주님과 함께 있던 본문의 제자들도 아직은 그 열정을 가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래 되자 때가 저물어 갔습니다(35절).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곳은 빈들이고 해가 저무니 그들을 보내서 무엇을 사먹게 하라고 합니다(36-37절). 눈 앞에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필요하였음을 알면서도 그들 스스로 해결하라고 두루 마을과 촌으로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고, 귀신들을 내어쫓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방금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무리를 위하여 그냥 가서 사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7절상)고 합니다.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여기 대명사 “너희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라”는 동사는 명령형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렇게 강조하며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더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37절하) 합니다. 자신들은 그들을 도울 수 없다고 합니다. 기껏해야 음식을 살 돈이 없다고 변명할 뿐입니다. 물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실 때 제자들이 당황한 것을 인간적으로 이해는 됩니다. 당연합니다. 남자만 5000명이면(44절)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대략 20,000명 정도인데, 그들을 다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 약 보통사람의 8개월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 있어도 모두 먹이기에 부족하겠다고 빌립이 말하였습니다(요 6:7).  그러자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38절)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코자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요 6:6). 그런데 빌립만 아니라 방금 단기선교에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돌아온 제자들 모두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성으로만, 현실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함께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인 예수님에게 도움을 구했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오병이어로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인다는 말입니까? 이성적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섭니다. 제자들에게 먼저 그 많은 무리를 다루기 쉬운 50명 단위로 나누어 푸른 잔디에 앉게 하십니다(39-40절). 마치 행정가처럼 행동하시면서, 서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음식 먹을 준비를 하게 하십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그 남은 떡 조각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41-43절) 하였습니다. 마치 출애굽 할 당시 바로 왕과 대적하던 모세가 갖고 있던 지팡이처럼,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에 갖고 있던 물매돌 몇 개처럼, 엘리야를 살렸던 가난한 과부의 떡처럼, 비록 작은 것들이지만 믿음으로 나갔을 때에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주님 안에 있으면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놓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 즉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이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특별한 능력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모인 자들이 모두 ‘아멘’ 하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는 자신의 몸을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제물로 드리실 그날을 미리 보여주시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쇠는 우리가 주님 손에 사로잡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어떤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분의 손에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의 문제를, 우리의 필요를 온전히 믿음으로 내어 드리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 그런 능력이 있음을 진심으로 믿습니까? 정말 주께 나오면 여러분의 영적, 육적인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 믿습니까? 아무리 작은 것, 연약한 것, 부족한 것이라도 주께서 아실 줄 믿고 정성을 다하여 믿고 내어 맡기면 여러분이 만족할 만하게 문제를 해결하시며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이심을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남은 것을 버리지 않고 열 두 바구니에 차도록 모으게 하셨습니다. 낭비가 없도록 하였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을 위하여 모으게 하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거저 받았다고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 남은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종들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언제 구체적으로 기적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오병이어를 가지시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떡을 떼어 주시는 그 시간에 끊임없이 떡을 떼어줄 만큼 계속 공급이 되었는지, 아니면 제자들에게 얼마씩 나누어 주고 나서, 그 제자들이 무리들에게 나누어 줄 그 때에 계속 떡이 공급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을 오병이어로 먹이시는데 제자들을 사용한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주님께서 얼마든지 말씀 한 마디로 먹을 것을 주실 수 있었는데, 제자들이 그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특히 빌립과 안드레를 통하여, 오병이어 도시락을 가진 한 소년을 사용하여 그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사용하셔서 주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이 세상을 향한 구속 계획은 어제까지도 그러하였듯이 오늘도 주께 속한, 주님의 손에 붙잡힌 종들의 증거와 그들의 수고와 봉사, 그리고 그들의 작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이 많은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그 분의 놀라운 지혜, 무한한 지혜 안에서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이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5-29)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약함, 부족함이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열쇠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느냐, 그 작은 것, 부족한 것이라도 드리느냐, 믿음으로 맡기느냐’에 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주께 보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이심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주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번은 엘리야 선지자를 시돈 땅에 있는 아주 가난한 사르밧 과부의 집에 보내었습니다. 그에게는 가루 한 웅큼과 병에 있는 아주 작은 양의 기름 뿐이었습니다.
3년 이상 비가 오지 않은 그 땅에서 먹을 것을 취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것인데, 하나님은 늙은 과부의 집으로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과부는 마지막 남은 한끼의 식량으로 아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을 결심으로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엘리야는 떡 한조각을 달라고 요청합니다(왕상 17:10~11). 놀라운 것은 엘리야의 말을 들은 과부가 그의 지시대로 그대로 이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한끼의 식사만 먹을 수 있는 “가루 한 웅큼과 병에 있는 아주 작은 양의 기름”(열왕기상17:12)으로 엘리야에게 대접하였을 때, 그 떡을 먹은 것은 엘리야 뿐만 아니라 과부와 아들까지도 여러 날을 먹게 되었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왕상17:16)!
오늘 본문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5000명의 남자들을 먹이심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 가운데에 4복음서에 다 기록이 된 유일한 기적입니다(마 14:13-21; 막 6:30-44; 요 6:1-15).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을 비롯하여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좀 더 상세히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행하신 이 기적은 바로 그 다음에 예수님의 ‘생명의 떡’에 관한 교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요 6:25-29).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의 양식, 말씀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 사건은 다시금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종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으로서 우리 죄인들의 영적인 필요와 육적인 필요를 채우며 섬기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고 하였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배고플 때 먹이시는 예수님, 보잘것없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예수님, 남은 떡 조각을 거두시면서 버리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러한 주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의 필요를 너무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고통 중에 있는 자, 가난한 자, 병든 자, 외로운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힘들어 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과 열정을 갖고 계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돌보시기 원합니다. 우리는 그저 믿음으로 그 분 앞에 나아가면 됩니다. 모두 내려 놓으면 됩니다. 간절히 아뢰면 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로서 주님처럼 우리의 이웃들에게 관심과 열정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사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37절)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던 제자들처럼 ‘우리는 이렇게 작은 것 밖에 없는데 안됩니다’ 라고 하지 마십시오. 인간적인 생각으로, 세상적인 계산으로 하려고 하면 당연히 못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돌보고자 하는 주님의 열정을 닮아 작은 것이라도 가지고 그들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어떤 작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붙잡히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역사하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주님에게 작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부족함, 작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작고 연약한 것을 사용하여 기적을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그저 믿음으로 순종하고 내 놓을 때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건강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힘을 쏟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이 일어나 더욱 건강해지며, 시간도 많아지고, 물질의 복을 받고, 힘도 더욱 솟아날 줄로 믿습니다. 내게 없는 것 만을 생각하고 불평하면서, 열등감으로 주님께서 주신 위대한 기회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연약하고 유한한 우리로서는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늘 주님을 가까이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 이후부터 라도 베풀어 주실 능력을 바라보며, 신뢰하고,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한번 믿어보고 그 사역에 동참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요,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부족한 저와 여러분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큰 뜻을, 섭리를 이루겠다는 주님의 열정을 은혜로 받고, 허락하신 비전들을 이루어 가실 주님을 확실히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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