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늘 평탄하지 않습니다. 마치 태평양을 항해하는 배처럼 때로 폭풍우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혹은 동서남북 사방이 다 막힌듯한 상황, 진퇴양난 속에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도 살아 계셔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난 주일 오병이어로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함은 자기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그 어떤 작은 것이라도 내어 놓고 맡기면, 그 손에 붙잡히면 주님의 놀라운 능력이 일어남을 체험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로 그 사역에 동참하는, 축복의 통로(도구)가 됨을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폭풍이 몰아치는 갈릴리 바다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며, 그들을 위험에서 구해 주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경외하게 하심을 봅니다. 제자들의 적은 믿음이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먼저 45-46절을 보면 지난 주일 살펴본 오병이어로 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기적을 행한 후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 벳세다로 가게 하시고 작별한 후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 가십니다. 공생애 사역하는 가운데 늘 그러하셨듯이 지금도 홀로 기도할 필요가 있어서 제자들과 헤어진 것입니다. 사탄이 그의 마음과 생각에 어떤 시험을 하려해도 그 유혹을 피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요한복음 병행구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오병이어 기적 사건 이후로 사람들이 그를 억지로 왕을 삼고자 하여서 홀로 떨어져 산에 오르셨습니다(요 6:15).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적을 처음 보았기에 이분이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으로 알고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잘못된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에 제자들도 같이 동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자신은 그 자리를 피하고, 그들을 따로 배에 태워 보낸 것입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47-48절) 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배는 이미 약 3-4 마일을 해변에서 떨어진 것입니다(마 14:24). 이미 전에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는 비슷한 사건을 겪은 저희들이었지만 그 때에는 배에 예수님께서 함께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막 4:36-41).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십니다. 분명히 바람이 거스리는 폭풍이 몰아치는 것을 아시리라 생각하고 제자들이 주님을 부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이 있기 전에 그들의 상황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돕기 위하여 기도를 중단하고 서두를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건 폭풍이건 다 창조주 주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미리 어떻게 하실 것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밤 사경’ 이라 함은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를 가리킵니다. 해 저물 무렵 (저녁 7시-9시 경)에 배를 타고 나갔다면 적어도 6시간 이상 제자들은 폭풍과 씨름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그들에게 다가가기 전 오래 기다렸습니다. 마치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은 다음 나흘 후에야 그에게 오신 것처럼 말입니다(요 11장). 그들의 심령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신 주님이셨습니다. 사실 이미 주님의 능력을 수차례 경험한 제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처럼 찬송하여야 했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8-10)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들이 구하기 전에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심을 잊었습니다(마 6:32). 그저 자신들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폭풍만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잊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결국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48절). 깜깜한 밤에 산에서 갈릴리 바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신 주님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다 보고 아신 주님이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이라 하여 소리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49-50절)고 하십니다. 깜깜한 어두움이었고, 폭풍이 휘몰아 치고 있었기에, 그리고 몇 시간을 파도와 싸운 그들은 두려움 속에 있었기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났어도 처음에는 몰라보았습니다. 그저 유령인줄 알고 더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비록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주님는 제자들의 약함을 알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용기를 내라’ 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왜 주님께서 이제야 나타나셨는지, 왜 늦게 오셨는지, 어떻게 하실 것인지, 따질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주님이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바다 물결을 잔잔케 하실 때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신 것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바다 위를 걷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물 위를 걸어보려고 하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지려고 했습니다(마 14:28-30).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건져 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고 꾸짖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두려워하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는 너무 기뻤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폭풍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구해달라는 말은 이미 필요가 없고 대신 나도 물 위를 걸어 주께 가까이 가게 해달라는 요구를 한 것입니다. 주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요구를 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제자들 앞에서 무슨 기가 막힌 쇼를 펼쳐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속히 주께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비록 불완전하고 약해도 진실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요청대로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심은 그의 동기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절대로 제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초청하지 않으십니다. 큰 열정을 가지시고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함을 아시고 오라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약한 믿음, 적은 믿음을 가졌다고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적은 믿음이라도 불쌍히 여기시며 그 위에 믿음을 더해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많은 인내와 관심을 가지시고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의 사랑을 받으십니다. 그들의 승리와 성공도 받으시지만, 시련과 고통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물 위를 오라 하심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치 물은 무엇을 적시듯이, 태양은 무엇을 밝게 하고 뜨겁게 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사랑입니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그의 자녀들을 변함없이, 무한히, 완전하게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신 목적은 그 자녀들을 구하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시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었습니다. 사실 그러실 필요가 없이 4장 때처럼 말씀 한마디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은 저들로 하여금 주님의 능력과 그 보호하심을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속한 자녀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능히 하신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떤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못 찾으실 수 없습니다. 그 어떤 폭풍이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구할 수 없을 만큼 심한 폭풍은 없습니다. 그리고 결코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He could never fail to save us! 그러므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가 우리의 삶을 위협할 정도로 크게 보이고 소망이 없는 것 같아도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도는 때때로 그런 고난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품 안에, 그 손 안에 있음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보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의 말씀에 거하기만 하면, 죄 짓지 않고 순종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그 신실하심을 칭찬하며 격려하실 것입니다.
아마도 산에서 홀로 기도하실 때에 주님은 베드로와 그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산에서 내려와 폭풍 가운데 그들을 직접 구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늘 우리 앞서 가시며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좌절하고 근심 걱정하고, 놀라며 두려워할 때에 사탄은 베드로처럼 우리로 하여금 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시냐고 의아하며 그를 의심케 합니다(마 14:31). 그래서 우리가 그런 환경에 눈을 돌리면 물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께 눈을 돌려 간구하면, 부르짖으면 주께서는 도와 주시고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그래서 베드로는 나중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고 적고 있습니다.
믿음은 확실히 어려움을 통하여 자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우리가 가진 믿음의 한계까지 끌고 가십니다. 그랬다가 가라앉을 것 같으면 건져 주십니다. 그럴 때에 주님을 부르면, 그 신실하심과 능력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은 그만큼 자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가진 믿음 안에서 주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부딪히는 어려움에서 그 한계를 발견합니다. 바로 그 때 또 한 단계로 우리의 믿음이 자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십시오. 할렐루야!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51절)라고 합니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있는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쳐 버립니다. 해변에서 3-4 마일 떨어진 바다 가운데서 약 6시간 이상 무섭게 휘몰아치던 폭풍이 즉시 멈추어 버립니다. 마치 바람이 그 시간을 기다린 듯이 말입니다.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랐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약 2년 가까이 주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보아왔는데 무엇을 또다시 놀란다는 말입니까? 그 이유를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절)고 하심으로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아니 얼마나 되었다고 금방 그 일들을 잊어버린다는 말입니까? 너무나도 어리석은 그들입니다. 그런데 자주 주님이 누구신지, 또한 그 동안 베푼 은혜를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하고 너무 비슷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다시 한번 제자들이 오늘 사건을 인하여 놀라고 확신하면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33) 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 절했다는 번역은 예배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당시 많은 군중들처럼 그냥 놀라고 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다같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인정하고 찬양을 부르며 함께 예배를, 경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에도 그를 찾아오는 모든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53-56절).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도 나을 것을 믿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응답하셔서 병자들이 다 고침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십니까? 그 분이 정말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여러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으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시는 분으로 믿습니까? 아니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분으로,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날이 곧 올 것을 믿으십니까?
그런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우리를 돌보십니다. 전능하신 그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의 당면한 문제로 말미암아 물에 빠질 것 같습니까? 그 상황을, 문제를 바라보지 마시고, 그 문제 뒤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요청하십시오. 구해달라고 하십시오.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의 기르시는 양들을 모른다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섭리가, 높으신 뜻이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한 단계 더 올리고 싶으신 것입니다. 더 자라게, 성숙하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견디어 내시며, 부르짖으십시오. 주께서 들으십니다.
모든 것 아시는 주님 나의 맘의 연약함 보시고
부족한 그 모습대로 주님 마음에 새겨 주시네
주님께 토로한 마음 하나하나 헤아려 주시니
그 마음 그 아픔들을 주님 손으로 품어 주시네
거친 길 위를 걸어갈 때도 험한 산이 앞을 막아도
빛 되신 주님의 두 손이 나를 붙드네
주의 마음이 닿은 내 삶에 저민 슬픔을 씻으시는
주님을 찬양 주 이름을 찬양하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