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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
한태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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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4-10-17 (목) 05:54 |
ㆍ분 류 |
수요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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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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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인하여 기쁨과 평안을 얻게 하라 (몬 1:18-25)
우리가 누구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아니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면 기쁨이 되며 마음에 평안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래서 늘 가까이 하고싶은 분들 말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고 참 기쁘다고 한다면 믿는 우리에게 무슨 더 큰 바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분들은 그들의 영적 지도자나 형제 자매들에게도 기쁨과 평안을 줄 것입니다.
한장으로 되어 있는 바울의 짧은 서신인 빌레몬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결론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빌레몬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참으로 귀한 성도 빌레몬의 사랑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빌레몬이 집을 열어 가정교회를 이루고, 교인들을 섬기며 참된 믿음의 교제를 나누며 전도의 열매를 맺고 있음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8-17절까지 바울이 빌레몬에게 이 서신을 쓰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갑자기 배신하고 도망간 범죄자 오네시모를 자신의 노예로 생각하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믿기 전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그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에게도 그러한데 하물며 빌레몬은 더욱 그렇게 주 안에서의 형제로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록 여전히 오네시모는 노예지만 두 사람 사이는 사랑하는 형제 사이가 되었으니, 용서하고 용납하라는 권면입니다. 형제애, 우정으로 두 사람 모두 가지고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사역에 대한 열정을 통해 일체감을 갖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이미 바울과는 오네시모는 그런 관계가 되었으니 그들 두 사람 사이도 그렇게 되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무, 동역자 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네시모가 지은 죄의 대가를 전혀 지불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18-19절)고 하였습니다. 오네시모가 도망쳐 나오면서 도둑질을 하였기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자신이 갚겠다고 합니다. 즉 사랑의 관계가 되었다고 책임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무척 중요한 교훈입니다.
기쁨과 평안을 주는 성도는 최선을 다해서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합니다. 사랑한다면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용납해달라고 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자들이라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사랑하기에 감당해야 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유도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의 빚을 청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은 죄의 빚을 그냥 탕감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들의 생명으로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진 오네시모의 빚을 자신이 갚으면서, 빌레몬이 빚과 용서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에게 빚진 오네시모를 용서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죄의 빚을 갚아주었는지 알고 있었겠으나 다시 기억하게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빌레몬이 바울의 전도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면, 그도 바울에게 사랑의 빚을 진 것이 있으나 그것을 말하기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19절하).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로서 죄를 지었기에 빌레몬이 그를 옥에 가두거나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도 죄 때문에 벌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게 되고 자녀가 되었으니 오네시모에게 은혜를 베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0-21절)고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서신의 중심내용이지만, 그것 만이 아니라 빌레몬 가정에 대한 감사, 그의 좋은 평판을 칭찬하며,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 성도들을 위한 그의 사랑으로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빌레몬을 인하여 기쁨을 얻기 원하고 마음에 평안을 얻기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어떤 사역자나 다 갖고 있는 바램입니다. 누군가를 생각할 때 기쁨이 되고 주 안에서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이라면 그만한 보람이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이 부탁하기 때문에 순종하기 보다,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또 오네시모가 변화를 받은 것을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주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인다면 바울은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빌레몬이 속한 골로새교회 성도들이 빌레몬의 삶과 격려를 인하여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듯이, 바울 역시 빌레몬이 믿음과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행동으로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기쁨과 평안을 주는 성도는 말씀에 순종하며 한 걸음 더 행합니다.
물론 바울은 빌레몬이 그렇게 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의 믿음, 사랑, 관대함 등에 대한 골로새교인들의 평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탁보다 더 큰 사랑을 나타낼 줄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곧 오네시모를 온전히 자유하게 하며, 형제로 받아줄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기대가 적으면 얻는 것도 적을 것입니다. 물론 기대한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실망을 하겠지만, 우리가 귀한 성도들에게 선한 기대를 하며, 존중하게 여긴다면 기대한 것만큼 얻을 때가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어서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22절)고 부탁합니다. 여기 ‘처소(guest room)’는 ‘셋집(rented house)’(행 28:30)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자신이 골로새에 머물면서 교인들을 가르치며 사역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가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정중하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 방을 내어주든지, 셋집을 알아봐 주든지 그가 선택하도록 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고 부탁하는 것을 보면 많은 성도들의 기도로 감옥에서 풀려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교인들의 기도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지 않습니까(22절)? 성도들의 중보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고, 그들에게 유익한 것이기에 말입니다. 21절까지는 빌레몬 개인에게 쓰는 서신이었는데, 22절에 와서는 “너희에게”라고 함으로 골로새교인 전체에게 보내는 서신이 됩니다. 즉 자신이 풀려나 그들을 방문할 때에는 골로새 공동체 가운데 오네시모도 함께 있을 것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히기 전에는 멀리 서바나(Spain)까지 선교를 갈 예정이었습니다(롬 15:24, 28). 아마도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간 1차로 (행 23:33; 24:27), 그리고 로마 감옥(House Arrest)에서 2년 넘게 (행 28:20, 30) 3년 가까이 2차로 옥중 생활을 지낸 후에는 자신보다 젊은 동역자들에게 선교를 맡겨야 하겠다고 생각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말이 가까워 옴에 따라 옛 동역자들이 그리웠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과 함께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함께 그들에게 안부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찌어다”(23-25절)라고 하면서 서신을 끝맺습니다. 우선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를 세운 사람으로 빌레몬과 그의 집에 모이는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데,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사실 동역자 아리스다고도 함께 갇혀 있습니다(골 4:10). 성경학자들은 에바브라와 아리스다고가 바울을 돕기 위해 자진해서 붙잡혀 갇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헌신은 복음으로 인한 우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줍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언급되기를,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 우상을 섬기는데 바울과 동역자들로 말미암아 위협을 받게 되었다고 소동을 피우고, 바울과 함께 동행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 붙잡아 연극장으로 데려가는 일이 있었습니다(행 19:29). 그 때 폭도들에게 위협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함께 로마까지 동행하였습니다.
마가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속해 있었는데, 그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에서 만나 유대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헌금을 전달하는 일에 동행했습니다(행 11:30, 12:25). 비록 중간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바울의 1차 전도여행에 같이 참여했었습니다. 중간에 돌아간 일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분열이 생겨서 한동안 바울은 마가를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상처가 치유되고, 이 구절에서 보듯이 다시 함께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고 하며, 마가를 데리고 로마로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사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관해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도입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동행하다가 떠났기에, 바울은 말년에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하였습니다. 아마 로마 감옥에 갇히기 전에 떠난 것 같습니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바울의 눈에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주의 일을 중도하차 한 것으로 생각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누가는 잘 아시다시피 바울의 동역자로 의사였습니다. 글도 잘 쓰고, 정말 주의 일에 열심을 내었던 사도였습니다. 바울이 말년에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동안 거의 모든 사람이 그의 곁을 떠났지만,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딤후 4:11상)고 한 것을 보면, 바울이 눈을 감을 때까지도 함께 하면서 돌보았던 절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신실했던 사도였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도로 바울의 기쁨이 되었고, 평안을 주는 자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이 찬양 가사처럼 주님의 기쁨이 되기 원합니까? 정말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원한다면 주위에 있는 성도들을 기쁘게 하며, 평안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적 지도자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셔서 즐거운 사역이 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고 하였습니다.
빌레몬서의 주제는 주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된 우리들은 어찌하든지 서로 용서하며,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잘못한 것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며 한 걸음 더 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끝까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쁨과 평안을 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누가처럼 끝까지 신실한 동역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가와 같이 중도에 실수를 했다가도 다시 회복하여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훗날 주님 앞에서 모두 칭찬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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