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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
한 태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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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09-03-21 (토) 01:01 |
ㆍ분 류 |
주일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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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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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09] 성도에게 있어야 할 최고의 미덕
성도에게 있어야 할 최고의 미덕 (사도행전 21:17-26)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나타나야 할 덕목들(virtues, characteristics)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과 인내, 절제, 화평, 자비, 형제우애, 부모공경 등 말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 그런 덕목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주님을 닮아가기 원하는 성도들에게도 그런 덕목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최고의 미덕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엇보다도 겸손(humility)입니다. 사실 다른 덕목들의 가장 기초가 되는 태도, 마음가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유명한 사도 바울의 겸손한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사실 그 당시 바울만큼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도 세상적으로 탁월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사울 왕의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엘리트 그룹의 바리새인에 속하였고, 최고의 랍비인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히브리인 중에서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빌 3:5). 누구보다도 유대 율법에, 전통에 열심이 있던 자였기에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존경받는 자였습니다(갈 1:14).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도 그의 이력은 화려합니다.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나타냈던 사도가 아닙니까? 이방인의 사도로 곳곳에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을, 동역자들을 세운 자가 아닙니까? 지난 주일에도 살펴보았듯이 3차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 밀레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도 많은 동역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지 않았습니까? 또한 많은 사도들 가운데 바울만 죽기도 전에 그의 영혼이 셋째 하늘에 들려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고후 12:2) 그래서 자신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스스로도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고후 11:5)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핍박을 당했습니까?(고후 11:23-27)
이 정도 되면 영적으로도 충분히 자기 자랑을 할만하고 교만할만하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말씀과 능력을, 그 동안 주님을 위하여 한 일을 자랑하며 과시할 수 있을텐데 바울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독선적이었고, 자기 중심적이었으며, 이기적이고, 자기 의를 나타내며 살았지만 주님 만난 후에는 변화를 받아 철저히 자신을 죽이고 겸손히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결박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전도팀은 형제들의 환영을 받습니다(17절). 다음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가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나 문안하고, 그 동안의 사역을 낱낱이 보고합니다(18-19절). 이방지역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상세히 알립니다. 자신은 그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다른 여러 서신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을 만나 어렵다는 것을 들었던 이방 교회들이 헌금을 거두어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이 두려워 오지 않았더라면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수고와 겸손이 교회들을 하나되게 하였으며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이 사실을 인정하였기에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였습니다(20절상).
교회가 하나됨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성도들 간에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서로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하나가 됩니다. 교만하여 자기 자랑이나 하고 자기 의를 나타내면 결코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 물질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말로 아무리 하나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겸손한 태도에서 나타나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헌금이 드려지고, 물질적으로 서로 도울 때에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걱정스러운 사실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어도 율법에 열심을 내고, 바울에 대한 오해가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를 미워하는 많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20-22절) 하였습니다.
바울로부터 이방사역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좋아했지만, 지도자들은 바울에 대한 오해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열심있는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염려합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보면 바울이 처음 전도여행을 떠난 이후로 예루살렘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수만 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단한 열심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어도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으로서 자녀들이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할례도 필요 없다고 하고 율법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고 들었으니 자신들의 신앙을, 민족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으며(행 16:1-3), 율법의 의식들을 계속 지키도록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의하도록 했나요(행 15장). 또 겐그레아에서 나실인의 서원대로 머리를 깎기도 했습니다(행 18:18). 바울이 주장한 것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25절 말씀은 예루살렘 첫 공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입니다. 이런 고소(accusation)들이 바울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기에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고소는 주위를 기울여야 합니다. 목사나 장로들에 대하여 잘못된 고소는 교회를 분열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그것을 노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 5:19)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나 장로에 대한 무슨 안 좋은 소문이 들리면 증인들과 함께 직접 확인을 하셔야 합니다. 그저 소문만 듣고 뒤에서 비난하면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타협안에 동의합니다. 지도자들이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23-24절)고 합니다. 이는 나실인의 서원을 하는 네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하여 회개하며 의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한 것이 잘못이어서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복음에 대하여 완전한 이해가 없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을 접촉한 자체도 부정하다고 여기기에 오해를 없애자는 타협안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이었기에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아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님을 알고, 율법의 의식들을 행하여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을 알고 믿는다고 한다면, 할례나 율법의 의식을 지키는 것을 전통적으로 해오던 유대인들이고, 자신도 유대인이라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유대인들의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면 기회를 보아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번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양보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 했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네 사람처럼 나실인의 서원 예식에 또 동참했습니다. 가난했던 네 사람의 희생 제물의 비용과 머리 깎는 비용까지 자신이 부담하면서 말입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26절) 하였습니다.
물론 바울이 고집을 피우고 논쟁할 수도 있었습니다. 결례식, 나실인의 서원 예식에 동참하지 않아도 죄 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아무 잘못도 없기에,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결례식에 동참하라는 것은 정말 자존심을 아주 뭉게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몇 몇 신학자들은, 28절 이하에 바울이 타협했음에도 불구하고 붙잡혀 결박을 당한 것을 보고 그 때 타협안에 양보하지 않고 신념을 가지고 싸웠어야 했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듯이 과거에 자기 자신도 할례를 주었었고, 나실인의 서원 예식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성경 진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성도가 누릴 자유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게 될 때에 유대인이라도 할례식이나 율법의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목적이 뚜렷한 바울이었기에, 겸손한 바울이었기에 얼마든지 비본질적인 것에 양보함으로, 적어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신뢰를 주었다고 믿습니다. 바울의 동기가 순수했다는 말입니다.
아니 오늘 이 사건의 본문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내세울 것이, 자랑할 것이 많은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본질적인 것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에는 얼마든지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내 의견, 내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상종조차 하지 않는 모습은 아닙니까? 복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전통이나 이론에 대하여 지나치게 고집을 피우지는 않습니까? 얼마든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십니까? 그러면 결코 하나될 수 없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에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근본적인 문제는 교만입니다. 만약 겸손하다면 그렇게 자기 것을 고집하겠습니까? 바울이 조금이라도 교만했더라면 절대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데, 그들 앞에서 변호하게 해달라고 하든지 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그 지도자들 책임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만 생각하면 얼마든지 ‘NO’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영혼 구원과 사람들을 얻는 것에 목적이 있었기에,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았기에 자존심을 버리고 낮아져서 네 사람의 비용까지 지불하며 의식에 동참했습니다.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비했습니다. 이 모든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도들 앞에 겸손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또 묵묵히 앞으로 다가올 핍박도 그대로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 8:13)고 하였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하였으며,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하-6)고 하였고,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겸손이 아닙니까? 원래 하나님과 동등한데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모양으로 사람과 같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지 않았습니까?(빌 2:6-8) 그 주님의 수많은 가르침을 집약하자면 겸손과 순종이 아닙니까? 성경 전체의 교훈이지 않습니까?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와 반대로 사탄은 교만과 불순종을 조장하지 않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사탄이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주와 같이 되려는 교만이 들어가니 불순종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늘 주의해야 합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교만하여 지지 않나 경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종종 다가오는 어려움,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요? 우리가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야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족이, 교우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겸손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야 할 최고의 미덕인 줄 믿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부름에 합당한 것입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하-3)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욱 겸손해질 수 있을까요? 매일 주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경향가든 성도님들께서는 바울처럼 모두 다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고, 가정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형제, 자매들을 섬기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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