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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자 |
한태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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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0-02-22 (월) 07:38 |
ㆍ분 류 |
주일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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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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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0] 성육신의 영광을 보아야
성육신의 영광을 보아야 (요 1:14-18)
지난 주일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적인 눈이 열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 소경으로 있다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모든 사람이 영적인 눈이 열려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서라고 했습니다(요 20:31).
그런데 만약 어떤 분이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시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그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전체 서론(1:1-18)의 절정입니다. 한 마디로 영안이 열려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이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받는 것이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우선 14절과 18절에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육신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14절에“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1절에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그 말씀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18절에서는“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독생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유일무이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게 인간의 몸으로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성육신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 대신 죽기 위하여, 죄 값을 치르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죽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연약함을 다 체험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시험을 예수님께서도 다 겪으셨다는 뜻입니다. 죄 없으신 몸으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희생제물인 흠 없는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 구원의 출발은 이 성육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한다 할 때에 요한이 사용한‘거한다’(skhnovw)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장막에 거한다(Live In a Tent)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장막이, 성막(Tabernacle)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를 통과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막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막이 무엇이었습니까? 광야 생활의 중심지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언약궤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피 뿌림이 있는 희생제사를 드리는 곳이었고,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바로 그 성막이 예수님의 예표(그림자)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예수님과 그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이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희생제물이 되신 것을 기억하며, 예수님이 우리 예배의 대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하)고 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 안의 사랑과 축복을 본 것입니다. 그 영광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 사랑과 축복을 체험한 것입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성도들이 성육신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체험하고,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하여서는 성육신의 영광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상처 받고 쓰러진 사람들이, 죄인들이 교회에 와서 치유 받고, 죄 사람을 받으려면 이 영광을 보고,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모습 속에 성육신의 영광이 반사되어 비추어져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예수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체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이 하나님의 영광이, 성육신의 영광이 사라지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사실 이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제일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치 구약에 나오는 이가봇의 저주처럼(삼상 4:22)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을 때에 그 나라는 망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면,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사회가, 그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이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 그래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그 나라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주여,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육신의 영광이 떠나지 않게 하소서!
사도 요한은 14절 하반절에서 이 성육신의 영광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으로 말입니다. 충만이라 함은 가득찬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가득찬 분으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절)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 예수님 안에는 고갈되지 않는 충만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안에 기쁨도 충만합니다(요 15:11). 그 안에 평안이 충만합니다(요 14:27). 즉 성육신의 영광을 보면 내 안에 진정한 평안이 기름 붓듯이 부어지게 되고, 견딜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하게 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 충만함도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성령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요 20:22). 즉 성도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가 성육신하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으면서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영광을 보지 못하는 가짜 신자입니다. 다윗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고백하였으며, 이어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어야 성육신의 영광을 보고 사는 진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모세의 율법과는 다르기에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7절)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던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여러가지 한계가 있었습니다. 장소적인 한계가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고, 그 효과적인 면에서도 한계가 있어 그들이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니까 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는 장소의 한계도 없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성육신의 영광을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율법을 다 어겼어도 예수님 안에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그 영광을 본 위대한 자라 하더라도 역시 그도 인간인지라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진리를 다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것을 누리지 못합니까?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뜻이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구하지 않으면 은혜를 계속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선물은 구하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충만함에서 흘러나오는 은혜, 선물인 것입니다. 구하기만 하면 계속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여러분들은 충만한 은혜를 간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한 가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14절에도 17절에도 은혜와 진리를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은혜와 진리는 따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 너무 중요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진리와 함께 서 있을 때에 온전한 은혜가 됩니다. 그저 은혜만을, 선물만을 원하면 값싼 은혜요, 기복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은혜 만을 원하고 진리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른들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는 큰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능력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큰 기적을 보지 못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에, 선물에 감격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면서, 장차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예언하시면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신처럼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된다고 하시니,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고 하였습니다. 즉 진리 없는 은혜는 헛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마치 많은 교인들이 은혜를 받으라고 하면 ‘아멘’하면서도, 이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면, 세상 모든 정욕을 버리고, 주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따라 가야 한다고 강조하면 귀를 막는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진리 없는 은혜는 헛된 은혜입니다. 성경은“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받지 말라”(고후 6:1)고 하였습니다. 은혜는 진리와 함께 해야 참된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은혜를 받으니까 믿음이 생긴 것이고, 지금까지 살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가지고 진리를 지키고, 진리를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정말로 참된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영안이 열리기 전에는 하나님 나라의 훼방자요, 포행자요, 핍박자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고, 성령 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것 가지고 무엇을 했습니까? 진리를 증거하는 일에 다 바쳤습니다.
여러분들도 과거에 은혜를 받았습니까? 그리고 현재도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을 받고 있습니까? 받은 은혜를 진리와 함께 사용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로 받은 은혜를 가지고 진리와 함께 동행하며, 진리를 증거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받고, 체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영안으로 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육신의 영광을 보기 원한다면 그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육신의 의미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의 인격이요 형상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남을 통해 예수님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을 가까이 하여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고 싶어하고, 진리를 더 알고 싶어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아는 일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찌하든지 자주 예수님과 만나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 체험을 하셔야 합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새로운 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소유한 그 어떤 것도 다 하나님의 선물, 은혜입니다. 우리의 건강도, 시간도, 지혜도, 권력도, 돈도, 심지어 자식들도 모두 다 하나님께서 잠시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런 선물들을 붙잡고 살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실 때 빈털터리가 될 것입니다. 마치 이 땅에서의 생명을 거두어 가실 때, 흙으로 돌아갈 때 빈 몸으로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이 서로 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이사야가 서 있습니다. 그럴 때 이사야는 자기의 죄 때문에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제단에서 취한 숯으로 말미암아 죄를 제거하고 난 다음에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참된 회개를 하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축복을 간구해야 합니다.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성육신하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에, 성령에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독생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며, 그 영광을 우리를 통해 주위에 환하게 비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영광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능력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주님의 영광이 가득찬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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