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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4-02-17 (월) 11:4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10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고후 5:1-10)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시는 분이 계신지요? 불신자와 신자가 다른 점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도 가장 극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생각과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입니다. 불신자들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조차 하기를 싫어하며, 말하기조차 싫어합니다.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를 잘 못합니다. 더군다나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 속에 오랜 시간을 고통스러워 하면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을 담담히 맞습니다.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죽음 이후에 더 좋은 세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고비를 자주 만났습니다. 하지만 겁내지 않고 오히려 죽음 이후에 거할 처소를 사모하였습니다. 죽은 후에 자신이 어떻게 될지를, 갈 곳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1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장막 집” 이란 우리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육신이 무너지면 갈 곳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입니다. 비교하자면 이 땅에서는 천막으로 만든 집이지만, 천국에서는 맨션입니다.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하는, 훨씬 좋은 집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주님 다시 오시면 우리 모두는 부활하여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들면 더욱 그 때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도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을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2-3절)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땅에서의 장막 상태에서 하늘에서의 맨션 상태로 바뀌는 것을 덧입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부활체는 지금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지정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지정의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하늘의 것으로 덧입혀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벌거벗은 자가 안 된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아무 감정, 의지, 느낌이 없는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서 하늘의 새사람을 입는 것이 아니라, 현재 몸이 자연스럽게 하늘의 몸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서로를 몰라보지 않습니다. 알아봅니다.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알아 보았듯이 말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있었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영적인 변화가 완전히 이루어져서 죄성은 없어지기에 이 세상의 감정과 생각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죄를 모르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뀌지만 서로를 알아본다는 것만 알고 계셔도 됩니다.
    바울은 좀 더 설명을 합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4절)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죄성이 있는 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과 같고, 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힘든 일을 만나 죽을 지경에 처한다 하더라도 겁내지 않습니다. 이유는 죽으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은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생명에 삼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것처럼, “사망이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는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라고 한 것처럼, 사망이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확신합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보장합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5절)! 즉 성령님이 영생의 보증입니다. 여기 “보증”이라는 원어의 뜻은 두 가지가 있는 데 하나는 ‘선금(deposit)’ 이며, 다른 하나는 ‘보장(guarantee)’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영생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이것은 완전한 구원을 약속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잘못 때문에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합니다. 물론 더 완전한 상태는 주님 재림하셔서 우리를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시고, 눈과 눈을 맞대고 주님을 볼 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6-7절)고 하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주께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실제는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에 항상 담대히 믿음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지만 되어질 것들을 믿음으로 미리 내다보면서 사는 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교회 일만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개인적인 일, 가정의 일, 직장 혹은 사업체의 일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고 있습니까? 죽은 후에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일하고 있습니까? 그런 분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속히 주님께로 가서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8절)고 하였습니다. 여태까지 떳떳하게 살았기에 언제든지, 죽음이 눈 앞에 와도 담대히 주님을 대면할 것을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더 구체적으로 믿음으로 행한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9-10절)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일이 모두 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교회 일도, 개인적인 일도, 가정의 일도, 직장 혹은 사업체의 일도 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바로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큰 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지극히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결국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왜’ 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문제입니다. 이유는 우리 모두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백보좌 심판은 받지 않습니다(계 20:11-15).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모든 일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되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장막 집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믿음으로 행한 일이 아닌 그 모든 것은 주님에게 꾸중을 듣고 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쌓아놓은 것입니다(고전 3:12-15). 불에 타 버릴 것들입니다. 본문 10절에서는 그것을 악으로 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구원을 받아도 불 가운데서 얻는 부끄러운 구원입니다. 근데 현재도 시험에 들어서 그 동안 쌓아놓은 공을 다 잃어버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만을 기쁘시게 믿음으로 행한 것들은 금이나 은, 보석으로 쌓아놓는 것입니다. 불 시험이 와도 없어지지 않는 것들로서 훗날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몸으로 어떻게 행하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각각 그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절하)고 했습니다. 비록 장막과도 같은 보잘것없고 연약한 질그릇이지만, 일시적이고 유한하여 얼마 있지 않아 쇠하여질 육신의 몸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있는 눈과 코와 귀와 입과 혀, 입으로 어떻게 행하고 사느냐? 머리와 손과 다리와 발과 오장육부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 라는 질문에 매일같이 대답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믿음으로 행하고 사십시오. 그것만이 남는 것입니다. 나중에 주님께 칭찬을 듣고 큰 상을, 면류관을 받는 일입니다. 우선 몸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몸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은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으며, 이 몸으로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영적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은 죽어져야 합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비록 목숨이 붙어있지만 내 자아는 죽어져 구별된 제물로 쓰임 받을 때 영원한 상이 주어집니다. 사실 내 안에 ‘내’가 살아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제물이 아닙니다. 하덕규 씨가 만들어 세상 가수들도 불러 히트를 친 ‘가시나무’ 가사의 첫 부분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인간관계 속에서도 이기적으로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에 가시나무 같다고 해석할 수 있고, 또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가 죽지 않아서 가시나무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자꾸 다른 사람을 찌르며 살기에 어둠과 슬픔만이 무성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결국 관점의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에 관점을 두고 사느냐,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의 영원한 것들에 관점을 두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사람들은, 죽어라고 이 세상 것들을 위하여 삽니다.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삽니다. 그러다 정작 죽음이 닥치면 두려워하다가 숨을 거두니 너무 허무하게 인생을 끝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눈이 보이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늘 나라에 관점을 두고 삽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 이후 주님을 만나 뵈올 날을 소망하며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고 삽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보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행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몸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합니다. 시간과 건강과 재능과 물질을 그 일에 투자합니다. 왜냐하면 훗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오늘을 거룩하게 삽니다. 주님께 드려진 제물이 되었기에 이미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처럼 몸을 드리고 삽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드립니다. 나는 기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은 힘들지만, 훗날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압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그 후에는 누구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불신자는 백보좌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영원히 지옥에서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는 누구나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심판입니다. 물론 벌을 주는 심판이 아닙니다. 상을 얻게 되느냐, 잃게 되느냐는 심판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나중에 다 똑 같은 하늘 나라에서의 삶이 아닙니다. 다릅니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됩니다.
    믿음으로 행하였는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였는지에 대하여 심판하시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산 제물로 드려져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다면 상이 있을 것이요, 내 안에 내가 살아있어 내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사람만을 기쁘게 한 일이었다면 상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이미 여러 불 시험을 주시면서 쓸데없는 것들을 태워버리셔서 정작 주님 만나면 아무 것도 내 놓을 것이 없는 신자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는 우리가 돌이킬 수 없기에 할 수 없지만, 지금부터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어떤 분은 인생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는 1) 할 수 있었는데(could have done it), 2) 했어야 했는데(would have done it), 3) 해야만 했는데(should have done it) 이라고 합니다. 지나간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하면서, 모든 일에 믿음으로 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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