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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4-04-14 (월) 09:0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16    
우시는 예수님(눅 19:37-44)



아마 이 전에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를 다녀보신 분들, 혹은 우리 교회에서 조금이라도 신앙생활을 하신 분들은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종종 들어보셨습니다. 사실 일반 고등학교의 세계사 시간에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에 대항하여 목숨을 내걸고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항의문(thesis of protesting)을 붙였습니다. 천주교의 잘못된 교리를 95개 조항으로 지적함으로 무너졌던, 타락했던 기독교 신앙을 재건하자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불길이 쯔윙글리나 칼빈을 통하여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오늘날까지 개혁주의의 신앙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종교개혁의 동기가 천주교 성직자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의 천주교회, 그 성직자들의 타락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직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래서 10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추기경에 오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루터 바로 전 세대의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수십명의 첩을 두고, 4명의 사생아를 낳은 파렴치한 자였습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성직자 축첩 제도까지 만들려고 하였던 정말 구제 불능의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원조 고아원의 태동은 그 때에 신부들과 수녀들 사이의 성범죄로 말미암아 생긴 사생아들 때문이었습니다. 또, 루터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의 취미는 도박이었다고 합니다. 귀족들과 추기경들을 모아놓고 밤새도록 돈을 걸고 카드 놀이를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취미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 스스로 죽은 영혼들의 죄까지 사해 줄 수 있는 권위가 있다면서 면죄부를 팔아 많은 돈을 축적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다 못한 청렴한 도미니칸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는 ‘네 자식을 몹쓸 놈으로 만들려면 로마 천주교의 성직자가 되게 하라’고 절규하였었습니다.
이렇게 교황이나 추기경, 신부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것은 종교개혁 당시의 시대 상황을 묘사하는 데는 정확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종교 개혁의 동기로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만약 윤리적인 문제였다면, 루터나 칼빈은 결코 로마 천주교를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천주교회에 남아 잘못된 윤리를 정화하며, 도덕적 청결한 삶을 위하여 투쟁하였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주의자들이 막강한 권력의 로마 천주교와 결별하면서 순교의 각오로 개혁 운동을 가속화 시킨 것은 윤리, 도적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천주교회가 잘못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윤리가 아니라 믿음의 내용 때문에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윤리나 도덕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합니다. 타락한 윤리나 도덕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은 몇 사람만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은 수 세대에 걸쳐 수천만의 사람들을 죽입니다. 그래서 이단이 무서운 것입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전통, 의식(儀式)을 집어 넣었습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공로를 집어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영광을 집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예수님처럼 행세합니다. 마리아를 무죄한 사람으로 숭배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겠다고 일으킨 운동이 종교 개혁이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는데, 비슷한 현상으로서 잘못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우리 기독교계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2000여년 전에 예수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을 채 남겨놓지 않고, 이미 예언되어진 구약 성경의 말씀을 성취하시고자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로마 정권을 뒤엎고 이제 유대인 자신들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줄 알고 종려나무(Palm Tree) 가지를 흔들고 찬양을 하였기에 종려주일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 그의 제자들을 불러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30절).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군중들과 제자들은 지금까지 보아온 이적들을 마음에 떠올리며 기쁨과 환호 속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37절). 드디어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로 여기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38절)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바로 다가온 예수님의 메시아적 운명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지, 잘못된 믿음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로 인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찬양 자체는 옳은 것이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또한 제자들과 온 무리와 달리 바리새인들은 이 노래가 예수님께 맞추어져 불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이 같은 노래를 하나님께 부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책망을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습니다(39절). 제자들과 온 무리들도 잘못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들도 다른 각도에서 잘못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러자 주님의 대답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40절)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 향한 제자들과 무리들의 환영과 찬양은 비록 잘못 믿고 하더라도 그 노래 자체는 참이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 들어있었던 것이었기에 어느 피조물이라도 이를 거스릴 수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의지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지, 잘못된 믿음 앞에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을 위하여, 화평을 위하여,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아들 메시아를 보내셨건만 이들은 아직도 영적 소경으로 남아있으니 안타깝고 슬펐던 것입니다. 그래서 42절에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하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교만과 전통, 관습에 얽매어 더 이상 메시아를 바로 볼 수 없다면 이들은 기필코 하나님의 정하신 심판의 날들을 피하지 못할 것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 또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43-44절)고 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문자적으로 주후 70년 로마 황제 디도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마지막 하나님의 대 심판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죄인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를 거절함으로써 이로 인해 장차 올 심판 날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주님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을 보면 마음이 찐해 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리 주님이 그렇게 우십니다.
혹시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 교회를 향하여, 우리 가정을 향하여, 우리 개인을 향하여 울고 계시지는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이 지금은 자신들 나름대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잠시 후면 거의 다 자신을 배신하고, 버리고,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있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기대가 무너져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겠습니까? 나의 인간적인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셔도 예수님이 ‘주(Lord)’이십니까? 한 피조물로서 당연히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한 심령이 그 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때를 놓치게 되면 슬퍼하며 우십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심판을 받게 될 일을 생각하고 우십니다.
잘못 믿는 것이나 믿지 않는 것이나 다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올바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 대로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이나 할 것 없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였으며, 성직자의 자질이 저하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앉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왜 교회를 다닌다는 사람들조차 삶이 정직하지 못하여 불신자들에게 조롱을 받아야 합니까? 문제의 근본적인 본질은 잘못된 신앙,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를, 가정을 부패하게 하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닐지 몰라도 올바로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로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로 믿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께서는 이미 축복을 받으신 것입니다. 적어도 개혁주의 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하나님 말씀 중심의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배우시니 말입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 당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 만이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율법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해 갈라디아서 1장에서 단호한 도전을 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십자가의 복음,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를 변질시키는 가장 큰 대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들어서 복음의 혼합화 현상이 극심해 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에다 심리학을 뒤섞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들먹이지만 실제 내용은 프로이드라든지, 스키너 등의 심리학자의 주장의 영향을 받아 설교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에 사회주의를 뒤섞어 버립니다. 설교에서 주님의 말씀보다는 마르크스 혹은 헤겔의 철학사상의 이야기가 더 강하게 들리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음에다 동양 철학 명상 사상을 집어 넣어 버립니다. 또 어떤 이는 복음에다 세상 Show Business 사상을 집어 넣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배당이 공연 장소가 되어 버립니다. 교인들은 구경꾼이 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됩니다. 인본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 복음의 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 라고 하였는데, 실상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 4:2)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결심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무엘상에 보면 언약궤 혹은 법궤 이야기가 나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이 진 이유가 언약궤가 그 자리에 없어서 졌다고 생각하고, 언약궤를 가져오지만 여전히 블레셋에게 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기고 맙니다. 무슨 부적처럼 언약궤만 있으면 이긴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블레셋에 있던 언약궤가 그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이 하룻밤 사이에 파괴되고, 그 신전이 있던 아스돗 사람들의 몸에 까닭을 모르는 독종이 퍼지기 시작하는 사건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것을 다시 이스라엘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서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그와 아들 엘리아살이 관리하게 됩니다. 그 후 70년이 지난 다음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자 제일 먼저 하나님의 언약궤를 생각하고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약 3만 명의 군사들이 아비나답의 집에 도착하여 엘리아살의 아들들 웃사와 아효가 언약궤를 맡고 있었는데, 그들이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예루살렘으로 행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갑자기 소가 뛰면서 수레에서 언약궤가 떨어질 것 같았습니다. 사실은 ‘뛰다’는 단어보다는 흔들렸다는 번역이 더 정확합니다. 문제는 그 때 웃사가 손으로 언약궤를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성경의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하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행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깨에 메도록 하였는데(민 4:15), 웃사와 아효는 수가 끄는 수레로 운반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수레로 운반할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방인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궤를 움직여야 했습니다. 또한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았다는 히브리어 단어도 그냥 잡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 소유인양 꽉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웃사는 제사장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고, 잘못 믿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지금 당장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미래를 본다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을 생각하시면서 우시지는 않으시겠습니까? 비록 함께 순서에 맞추어 찬양을 부른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아니면 참으로 주님께서 기쁘시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회개(회심)하지 않은 심령을 바라보며 울고 계십니다. 첫 종려주일의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을 바라보고 우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때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우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그리스도로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온갖 수난 속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셨습니다. 나의 죄 때문인 줄 알고 믿으면, 회개하고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시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진심으로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찬양을 드리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구원에 이르는 데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니 이미 구원의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우리 주위에 잘못 믿고 있거나, 믿지 못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우십니까?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위하여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참된 의미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시 126:6)라고 하였습니다. 영혼 사랑보다 더 귀한 사랑은 없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과 잘못 믿고 있는 영혼들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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