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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4-05-05 (월) 06:25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92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고후 8:9-15)



내게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경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자기에게 필요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저희 집으로 종종 구제 단체에서 옷이나 가구가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줄만한 것이 없느냐고 전화가 옵니다. 그러면 사모님이 약속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까지 쓰지 않는 옷이나 물건들을 모아두었다가 전해주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내게 필요는 하지만 두 개가 있어서 하나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컴퓨터나 핸드폰, 밥솥 등이 두 개가 있는데, 어떤 분이 그것이 필요해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것도 있고, 그 사람도 필요한 것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끝으로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는 그것 없이 지내는 것입니다. 내가 남는 것이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에게 줌으로 그 사람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고 마음이 뿌듯해져 주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없어서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나눔입니다. 다른 사람의 축복을 위하여 나 자신의 고통을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나를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기꺼이 자신의 불편함을 참고 인내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부요하신 주님은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9절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쓰고 남는 것을, 내게 필요 없는 것을 주는 사랑이 아니고, 두 개가 있어서 남는 것 하나를 주는 사랑도 아닙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주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지금 그런 주님의 사랑으로 나누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두 개 가운데 하나를 나누라고 합니다. 그런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실천하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한번 9절 말씀을 살펴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부요하다’는 말이나 ‘가난하다’는 말을 물질적인 것으로 국한시키면 안됩니다. 우리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아니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유명한 19세기 개혁주의 신학자 Charles Hodge 는 ‘우리 예수님에게는 모든 하나님의 이름들과 직함들을 적용할 수 있다. 그 분은 참 하나님이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주,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불리워졌다. 성경 속에 예수님은 모든 하나님의 속성으로 표현되어졌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유지되고, 그 분을 위하여 존재한다’라고, 그의 저서 ‘조직신학’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분을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적인 부자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부하다, 가난하다는 말은 서로 비교할 때 사용하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절대적으로 다 갖고 계십니다. 물론 실제적으로 비교적 가난한 가정에서 육신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인간들에게 가난하게 보이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염두에 두고 바울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금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우니까 돕자고 하는 의미에서 부와 가난으로 표현한 것이지, 실제 의미는 참 하나님이 사람으로 성육신하신 것을 뜻합니다. 아니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한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뜻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보다 높고 존귀한 분께서 스스로 낮고 천하게 되셔서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말입니다. 우리를 천사보다 존귀하게 하기 위하여, 만왕의 왕의 아들, 딸로 삼기 위하여 말입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말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복을 받았습니다(엡 1:3).
그러므로 이런 복을 받아 누리고 사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그 큰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는데 어떻게 살아야 마땅하겠습니까? 우리도 그 주님을 닮아 그렇게 사랑하고 나누어 주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런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따라 이 세상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고 살기 원하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니 근심, 걱정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내 영혼이 구원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으로 만족한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나누고 사는 기쁨을 맛보고 살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돕겠다고 마음을 먹은 지가 일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하고 있지 않음을 탓하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를 하라고 권면합니다(10-11절). 그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합니다. 처음 시작한 일의 마무리를 지으라고 합니다. 다만 있는 대로 하고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시간이 지나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어떤 결심을 하고 나서, 사정이 변하거나 마음이 변해서 중간에 포기할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선한 뜻을 잊지 않으시고 기다리십니다. 나중에라도 우리의 믿음이 자라서 성숙해진 후에라도 그 뜻을 이루시기 원하십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예루살렘교인들을 돕는 것은 중요한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고린도교인들을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일년 전에 마음을 먹었다면 지금이라도 감당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물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의무감으로 강제로 하는 것 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축복과 관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있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12절)고 하였습니다. 결국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마음이 없다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이전에 주님 보시기에 선한 계획을 했거나, 주님과 약속한 일이 인색한 마음으로 인하여 변해서 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아니 이후에라도 하나님께서 생각하게 하신다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다면 행해야 합니다. 안하고 계시면 성령님께서 슬퍼하십니다.

13-14절을 보면,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인들에게 요구하는 사랑의 실천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두 개 중 하나를 나누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있는 것으로, 넉넉한 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나 하나, 그 사람 하나 서로 하나씩 갖게 되어야 평균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또 그들도 지금은 넉넉하지만 어려울 때가 올 때에, 반대로 도움을 받아서 부족한 것을 채울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앞 날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지금 바울이 사회주의 사상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균등하게 소유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넉넉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좀 비슷하게 살자는 것입니다. 너무 부자도 아니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게 말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희생을, 그 사랑을 설명한 후에, 있는 것 중에 하나를 나누는 원리를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믿는 성도들이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사랑, 최소한의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내게 필요가 없는, 남는 것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하는 구제입니다. 믿는 자라면 그 뿐만 아니라, 나도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좀 넉넉하니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없는데 억지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 갖고 있는 것보다 함께 나누면 기쁨이 배가 되지 않습니까? 그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것을 반으로 나누어 줄 때 기쁨과 축복의 은혜는 배가 됩니다. 물론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면 안됩니다.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는 사람이 거만하면 안되고, 받는 사람은 비굴해지도록 하면 안됩니다.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했는데 자랑하거나 과시하면 웃음거리 밖에 안됩니다. 그저 겸손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이어서 바울은 15절에서 출애굽기 16장 18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먹여주신 만나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후에 광야를 행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만나를 매일 주시는데 하루에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지 욕심을 내고 많이 거두어 쌓아둘 경우에는 남는 것에 벌레가 나서 먹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또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게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채워주시니 욕심을 내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루에 필요한 양식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양식을 주실 때에는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끔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어도 내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욕심내지 말고,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의 통로가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처럼 내가 가난해지면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굶어가면서 다른 사람을 먹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일단 내 자신이 먹고 난 후에야 다른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지 내가 굶고 있는 상황에서 남에게 무엇인가 준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말 주님의 사랑과 같은 위대한 사랑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삶을 요구하시는 분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 분이고, 또 감당할만하기에 요구하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약간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것 중에 필요 이상으로 있는 것을 나누라고 하십니다. 굳이 우리 자신을 크게 희생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많이 주셨습니다. 특히 이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가졌고, 누리고 있습니다. 있는 것 중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과, 이웃들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그렇게만 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제가 자주 강조하는 것이 우리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한다면 내게 있는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최소한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있고,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베풀어야 합니다. 물질뿐만 아니라, 시간도, 지식도, 재능도 나누어야 합니다. 이웃들에게, 형제 자매들에게 관심을 갖고 나누어야 합니다. 성경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 2:14-17)고 하였고,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해석이 필요가 없는, 다 깨달을만한 말씀들입니다.
우리 경향가든교회 교우들은 모두 사랑을 실천하는, 몸소 베풀고 나누어 주고 사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산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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