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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6-26 (일) 07:58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458    
부르심을 따라 (갈 1:11-24)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누군가가 의심을 한다면, 신뢰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사, 변호사, 교사 등 이 사회에서도 그렇습니다만, 특별히 교회에서 사역에로의 부르심에 대해 의심을 한다면 정말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 가운데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부인하거나 의심하는 자들에게 변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바울의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지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1절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2절)! 사실 그들이 거짓교사들,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듣고 복음을 왜곡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이 받은 복음은 사람에게 받은 계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섭리를, 인간을 향한 구원 계획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계시 말입니다. 바울은 이 계시를 주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에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간증을 시작합니다. 대부분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도 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사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합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13-14절)라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유대교 신봉주의자요 랍비로서 교회를 엄청나게 핍박하였습니다. 조상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목숨을 걸고 지킬 정도로 유대교적인 열심이 지나쳤는데, 나름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같은 동연배는 고사하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난 것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5절)라고 고백한 것처럼,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바울이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안 것은 아닙니다. 믿고 난 후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심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불러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하시면서, 아무 자격이 없는 자를, 아니 너무 못되게 살았던 자신을 그냥 불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작정의 일부였다고 말합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16절상)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을 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그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부르심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말씀을 듣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행 1:22).
그래서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6절하-17절)고 합니다. 여기 “혈육”이라 함은 친척이나 식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그의 사도됨은 어떤 사람과 의논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은 예루살렘에 가서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서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가롯 유다 대신 사도가 된 맛디아를 포함하여 12사도들에게 조언을 구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아라비아로 갔다고 합니다. 정확히 아라비아 어딘 지를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르지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다메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곳에서 3년 가까이 지낸 후에(갈 2:1) 다시 다메섹으로 갔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12사도들과 함께 15일 머물렀다고 합니다(18절). 아마도 3년동안 기도하고, 메시아의 예언에 대한 구약성경을 연구하며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훈련의 시간이었겠지요. 마치 12사도가 3년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면서 말씀을 듣고 교제한 것처럼 말입니다.
다메섹에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니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문을 지켰기 때문에 그를 바구니에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렸다고 누가는 기록하였습니다(행 9:23-25).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사귀기를 원했으나 사도들이 그를 만나기를 꺼려 했습니다(26절). 이유는 그가 과거에 교회를 핍박한 전력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 9:27)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3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 오일을 유할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18-19절)고 한 것을 보면, 그들과 교제가 많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마 다른 사도들과는 인사만 했고, 야고보 사도 하고만 교제를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사실을 증거한 후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20절)고 단언합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이 복음을 전하러 다닌 결과를 말합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21-24절)!
그가 복음을 전한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은 유대 지역보다 많이 위로 떨어져 있습니다(행 15:23). 특히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행 21:39, 22:3). 그곳의 수도는 바울이 태어난 다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을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다 듣고 있었습니다. 교회들이 개인적으로 바울을 만난 적이 없어서 그의 얼굴은 모르지만 소식을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변화를 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에서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하였으나 몰래 숨어 들어온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이 이방인 신자들도 유대인들처럼 구원을 받고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유대율법과 관습을 따라야 한다,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복음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복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 구원이라는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도적 권위로 가르치는 복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의 진실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흠집을 내려는 사탄, 마귀의 수작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전한 복음을, 진리를 변호하기 위해 이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직접 주님에게로부터 받은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에 진리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기독교 연구 조사 전문기관을 설립한 조지 바나라는 분이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동안 교회 성장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수년 전의 연구 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주일에 교회를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성인들의 절반이 복음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들과 함께 매 주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를 드렸는데 그 중에 반이 불신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충격이지요.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래도 90% 이상이 복음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확실히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주님을 정말 만났습니까? 그 분의 음성을, 말씀을 듣고 믿어졌습니까? 그래서 변화를 받았습니까? 믿기 전의 삶과 믿음 후의 삶이 달라졌습니까? 간증이 있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하신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고 하였고,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변화를 받았다면,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일을 감당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는지는 모를 수 있고, 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마다 다 서로 다르게 사용하십니다. 은사가 다 다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마치 그릇의 용도가 다 다르듯이, 그 그릇에 맞게 사용하십니다. 마치 12사도가 초대 교회의 기초가 되었으나 각각 다 다르게 사용이 되었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부름을 받은대로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하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인정받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신실하게 일하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거짓된 동기로 일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 다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공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드러나게 되어 있고, 다른 믿음의 가족들에 의하여 평가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진실한 사람만이, 신실한 사람만이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인정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복음이 전해질 수 없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진리로 믿지 못하겠지요. 그러니까 평신도도 물론이지만, 사역자라면 주님을 만난 경험이 확실해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져야 합니다. 확실히 변화를 받았어야 합니다.
그런 분들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분들과 특히 사역자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증거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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