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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4-09 (목) 00:37
분 류 특별설교
ㆍ조회: 867    
고난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요 19:1-16)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넷째날
때때로 우리는 큰 그림을 놓치고 작은 것들에 얽매어 힘들어 하고 스스로 마음 아파합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좀 넓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 목적을, 사는 이유를 놓치면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지 해답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 중 일부의 모습입니다. 채찍질 당하시고 조롱 당하시며, 손바닥으로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1-3절), 수많은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에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가장 극악한 형벌인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시게 됩니다. 어제도 언급했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인줄 알고 무죄를 선언하려고 애 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4절, 6절하). 그가 아무리 심문을 하고 판단을 해도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생각이 되면 양심에 따라 무죄를 선언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니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6절) 외치는 유대인들의 위협이, 민심이 두려웠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무죄 선언을 하고 풀어주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총독에 대한 평판이 안 좋아질 것이고, 또 유대인의 왕이라는 자를 놓아준 것이니 가이사 로마 황제에게 불충한 것이 됩니다. 그에게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7절)라고 하니, 더 두려워합니다(8절). 그래서 예수님께 이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너는 어디로서냐”(9절)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이유는 이미 할 말을 다했으니 이제 빌라도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결정,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는 답답해서 다시 심문을 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풀어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데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고 하니(10절), 예수님께서 분명히 대답하시기를 그 권세는 위에서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1절). ‘위에서 주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잠시 빌려준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잠시 빌려준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빌라도에게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네 양심대로 판단하여 재판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재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양심에 따라 판단하여 재판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지금 예수님은 빌라도의 권세에 복종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또 다시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힘쓰는데,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2절)라고 합니다. 여기 ‘가이사의 충신’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는 가이사의 지지자, 가까운 관계에 있는 자, 측근 중의 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소리야 말로 가장 큰 협박이었습니다. 그래도 빌라도가 너희 왕이라고 하면서 머뭇거리자(14절), 또다시 저희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없애버리라고 외치자(15절) 결국 그들에게 굴복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고 맙니다(16절). 아마 자기가 예수님을 놓아주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말입니다.
저는 고난주간 넷째 날을 맞이 하면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채찍질 당하시고, 손바닥으로 맞으시며, 조롱 당하시며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을 맛보셔야 했던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로마 군인들로부터 인격을 짓밟히는, 마치 짐승 같은 취급을 받으시며, 채찍질이며, 맞으시며, 모욕을 당하시며 아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의 고통까지 당하셨는데,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이 진리를 믿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베드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라고, 이사야 53장 5절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즉 우리가 맞아야 할 것을 대신 맞으신 것이며, 우리가 조롱 당해야 할 것을 대신 당한 것이며, 우리가 십자가의 극형을 받아야 마땅한 것을 대신 받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벌을 받아야 할, 저주를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 아직 죄성이 있기에 사실 우리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죄를 사람들 앞에서 폭로할 것 같습니다. 그저 겉 모습만 보고 누가 나를 존경하고 칭찬하는 말을 하면 ‘아 저 사람은 잘 모르고 저런 소리를 한다. 아직 내 속에는 무서운 죄가 있고 부끄러운 실수들이 있는데. 아직도 나 만이 알고 있는 위선적인 모습이 있는데’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 때에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 대신 그 모롱을 당하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 맞으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무서운 채찍을 맞으신 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얼마나 아프십니까? 내가 맞아야 할 것을 주님께서 다 맞으셨군요. 내가 당해야 할 십자가의 고통을 주님께서 다 당하셨군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나는 괜찮다. 이제 더 이상 죄의식으로 고통 받지 말고 믿음으로 떳떳하게 살아라’ 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데 거저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입니다. 참으로 귀한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아무런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감추고 또 감추려 하는 부분들을 믿는 자들은 너무나 쉽게 남에게 고백합니다. 이유는 이미 그 상처가 아물었고 치료 받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아직도 주위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 때문에 고통을 받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 소리 대신 주님의 채찍질 당하는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 죄 짓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감추어 놓은 은밀한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 부끄러운 죄인들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대신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고통 당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귀에 그 채찍 소리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맞으시며 조롱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신음하시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속이려고 할 때마다 그 무서운 채찍 소리와 신음 소리가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엄청난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으니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과 실수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은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고서, 다른 사람이 조금 잘못했다고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데, 다른 사람에게 ‘그것만은 안돼’ 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절)고,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거의 대부분은 ‘남(other) 때문’ 이라고 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니까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주는 십자가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런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말로나 주먹으로 때리거나 조롱할 때, 그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뭐 당연하다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원수는 분노의 감정이요,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입니다. 살인입니다(요일 3:15). 남에게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주님께서 맞으셨던 채찍의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남이 미워질 때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시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 우리 사회에는, 심지어 교회에서건 가정에서건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싸움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싸움을 그쳐야만 평화가 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깨달았으니 당연히 우리가 중단해야 합니다. 고난의 주님을 생각하고 우리가 당하는 쪽이 되어야 합니다. 지는 쪽이 이기는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던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하기를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고 하였습니다. 정말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 은혜를 받았으니,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여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잘못과 실수를 용서받고, 용납이 되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이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고난의 십자가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짓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Passion of Christ’ 영화에서처럼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 의하여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맞으시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그 조롱과 모욕을, 십자가에서 신음하시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맞았어야 할 채찍, 조롱과 모욕, 십자가의 고통을 대신 지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으시면 안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큰 그림을 보셔야 합니다. 작은 것들에 얽매어 나 자신에게 스스로 고통을 주고, 자신을 작게 만들면 그야말로 졸장부가 됩니다. 그 고귀한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넓은 마음으로 크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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