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등록 비번분실

전체방문 : 5,017,874
오늘방문 : 894
어제방문 : 2757
전체글등록 : 3,841
오늘글등록 : 0
전체답변글 : 2
댓글및쪽글 : 18

좌측_배너 배너 001

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8-12-17 (월) 07:2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090    
성탄의 기쁨을 놓치지 않으려면(눅 2:1-7)


저는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만약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린다면, 첫 성탄의 기적(The Miracle of the First Christmas)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릴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때의 환경은 그야말로 혼란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혁명과 음모가 잘 날이 없던 때였습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살던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열심당(The Zealots)이라고 불리우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로마 제국을 뒤엎으려는 목적에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도 열심당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지요(눅 6:15). 물론 로마 제국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군사력, 무력으로 큰 권세를 휘두르고, 거의 전 유럽의 나라들을 정복하며 그 지경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복한 나라로부터 세금을 엄청나게 거두어 드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로마에게 정복당하여 속국으로서 그 요구하는 것에 대하여 속수무책으로 바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던 분봉왕(tetrarch)은 헤롯 대왕이었습니다(마 2:1). 그의 잔혹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권세를 뒤엎으려 한다는 의심만 들면 친족이라도 극형에 처했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의 탄생 소식을 듣고 죽이려 했던 왕이었니다(마 2:13). 그들은 권력과 무력으로 유대 땅을 완전히 장악하였기에 유대인들은 별도리 없이 로마 정권이나 그 하수인 분봉왕의 다스림에 복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양쪽 사이에 긴장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아래 살 때에 일본사람 들과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처럼 말입니다.
   종교적으로도 지난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말씀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선지자도 없었고, 하나님의 기적이나 표적도 없었고, 참된 예배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던 시대였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리며 소망하는 것도 지쳐버린 듯한, 한마디로 깜깜했던 시대였습니다. 바로 이런 암흑의 혼란 시대에 그것을 마무리 짓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이 바로 2000여년 전에 시작된 것입니다. BC 700년경에 미가 선지자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고 한 예언이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우리에게는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로 알려진 아구스도(Augustus) 로마 황제 때의 사건입니다(1절). 그는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 BC 100-44) 황제 조카딸의 아들로서 BC 27년에 아구스도(Augustus)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칭호는 ‘숭고한 자, 고귀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 받았습니다. 그가 실권을 잡은 후에 BC 6년경에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전 지역에 세금을 더욱 철저히 거두려고 인구조사를 위한 호적(register)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땅은 엄청 넓었기에 약 1년 후에 팔레스틴 수리아 지역에 인구조사가 실시된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본문의 구레뇨(Quirinius)는 BC 6년부터 수리아의 총독을 맡았다고 합니다(2절). 그래서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인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을 향하여 갔던 것입니다(4-5절). 다윗의 후손 가운데 메시아가 탄생하리라고 하신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제는 요셉과 함께 고향에 온 마리아가 만삭이 된 몸이었기에 언제 아기가 나올지는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6-7절에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부인이 배가 불러 힘든 가운데, 지금 막 해산하려고 하는데, 거할 곳이 없습니다. 사관(inn)이라 함은 오늘날 여러분이 생각하는 지붕이 있는 정식 여관이 아닙니다. 당시 정식 여관은 두 종류로, 2층으로 되어 있으면 1층에는 동물들이 기거하고 2층에 여행객이 머물도록 되어있거나, 1층으로 되어 있으면, 옆에 마구간이 붙어있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가난해서 그런 곳은 찾을 생각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여기 사관은 지붕이 없는 어느 개인 집의 별관이 아니면 공동 피난처(public shelter)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조차 있을 곳이 없다’고 하는 말씀에 저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만약 사관이 개인 집의 별관이었다면 집 주인이 요셉 식구를 하찮게 여기고 차갑게 거절한 것이거나, 만약 공동 피난처라면 사람들로 가득차서 요셉 식구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요셉은 마리아를 마구간으로 데리고 가서 말 구유(manger)에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 ‘구유’란 소나 말, 또는 나귀가 ‘죽’을 먹는 그릇, 즉 여물통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극 때에 보는 낭만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더럽고 냄새가 나는 여물통에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광경에서 사관 주인이나 공동 피난처 사람들이 놓쳐 버린 첫 성탄의 기쁨을 생각해 봅니다. 만약 저들이 마리아의 몸에서 탄생하는 아기가 메시아,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그렇게 홀대 하였을까요? 영적으로 무지하였기에 당연히 첫 성탄의 기막힌 기쁨과 영광을 체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의 동방박사들이나 마구간 바깥의 목자들은 천사들의 인도로 그 탄생을 깨닫고는 축하와 함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까(마 2:9-12, 눅 2:8-20)? 그러니 그 사관 주인이나 공동 피난처 사람들이 놓쳐 버린 성탄의 기쁨을 훗날 얼마나 아쉬워했겠습니까? 세계 역사를 B.C. 에서 A.D. 로 바꾸어 버린 그날을 축하하며 기뻐하지 못하였으니 얼마나 후회하였을까요? 오랫동안 예언되어진 메시아임을 알았을 때에는 통탄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그 때 사관의 집 주인이나 공동 피난처의 사람들처럼 어리석게도 누가 탄생하게 되는지도 모르고 이 감격스러운 성탄의 기쁨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아기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탄생하셨습니다.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Incarnation)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를 짓고 살기에 그 죄의 대가를 마땅히 치러 심판을 받아야 하건만, 대신 죄를 짊어지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으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요 1:12). 뿐만 아니라 이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3).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남긴 말씀이시기도 합니다(마 28:20). 주님은 승천하셨어도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영원히 함께 있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말입니다(요 14:16).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를 홀로 두기 원하지 않습니다.
   또한 아기 예수는 온 세상을 친히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오셨습니다(계 17:14, 19:16). 물론 궁극적인 통치는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셔서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이지만,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이러한 왕의 탄생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이제 다음 주일이 성탄주일이며, 곧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 탄생할 그 때 성탄의 기쁨을 놓쳐버린 자들처럼 되지 않기 바랍니다. 정말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며, 감사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첫째,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죄 사함의 은총을 감사하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누구나 죄를 그대로 지니고는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나중에 심판으로 해결 받습니다. 둘째, 임마누엘의 주님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자녀 삼으시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늘 함께 하시는 분을 체험하고 사십시오. 우리는 외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임마누엘을 믿지 못할 때에 외로운 것이지요. 셋째, 예수님은 왕으로, 온 세상의 주(Lord)로 오셨음을 기뻐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진정한 왕이, 주가 되심을 감사하십시오. 만약 사탄이 왕이 되어 나를 다스린다면 내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시고, 나의 삶을 주관하심을 감사하십시오. 믿으십시오. 정말 모든 것을 다 맡겨도 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여러분이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만왕의 왕이, 구세주가 얼마나 비천하게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방이 없어서, 냄새 나는 말 구유에서 춥게 나셨습니다.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처럼 왕궁에서 나실 수도 있었겠는데, 그토록 혼잡한 시기에 낮고 낮은 곳을 택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돌아가실 때에도 가장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만 오실 때에도 겸손히 오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어떻게 교만하게 산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의미 속에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하겠습니다. 첫 성탄의 진정한 기쁨을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의미도 모르는 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며 흥분하는지 알 수 없지만, 또 어떤 이는 예수는 모르는 채 박애주의(Humanism)로 자선을 베풀며 자기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들만큼은 구세주로, 임마누엘로,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오신 예수의 탄생에 그 기쁨과 감사로 지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주위를 돌아다 보시고 이 성탄의 기쁨을 나눌 사람들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통계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자살이 많은 때가 이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분주한 가운데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입니다. 정말 예수님이 필요한 인간입니다.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우리 주님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롬 3:23). 죄의 결과 인간 모두에게 사망이 왔습니다. 그런데 원죄로 말미암아 태어나면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사망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누구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종교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어떤 신을 찾느냐는 것이지요. 죽은 신이냐, 살아계신 하나님이냐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기에, 참 빛이시기에 그들은 작은 예수처럼 주님을 품고 사는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합니다. 암흑 속에 빛을 찾고 있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 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우리의 사랑으로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사랑하는 여러분!
   또 한가지 오늘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400년의 암흑기가 지나면서도 메시아를, 빛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빛을 만나는 순간 심령 깊은 곳의 기쁨을 누리며 평안을 체험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오신 이후 오늘날까지 어두운 가운데 참 빛을 만나고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성도들은, 비록 육신의 몸을 입고 이 험한 세상의 나그네 길을 가지만, 그 심령에는 주님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다렸던 몇 몇 사람들처럼, 그의 재림을 기다리며 소망 속에 살아갑니다. 요셉과 마리아처럼 당시가 아무리 어두운 시대이었어도 하나님의 때에 큰 선물을 받아 섬겼던 것처럼, 이 세상이 어두운 것 같아도,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아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서면 그 누구도, 사탄 마귀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고 참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아 멘!!
   
번호     글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231 주일설교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 (삿 6:11-17) 관리자 2022-02-28 468
1230 주일설교 연약한 제자들 (눅 22:21-30) 한태일 목사 2022-02-20 618
1229 수요설교 부자들에 대한 경고 (약 5:1-6) 한태일 목사 2022-02-17 562
1228 주일설교 최초의 성찬식 (눅 22:14-20) 한태일 목사 2022-02-13 773
1227 주일설교 십자가의 죽음을 예비하시는 하나님 (눅 21:37-22:13) 한태일 목사 2022-02-06 593
1226 수요설교 선을 행하라 (약 4:13-17) 한태일 목사 2022-02-04 509
1225 주일설교 조심하고,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리 (눅 21:29-36) 한태일 목사 2022-01-30 562
1224 주일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들 (3) (눅 21:20-28) 한태일 목사 2022-01-23 570
1223 주일설교 세례 요한처럼 (마 11:7-15) 한태일 목사 2022-01-16 576
1222 주일설교 내가 들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2-14) 한태일 목사 2022-01-09 609
1221 수요설교 서로 비방하지 말라 (약 4:11-12) 한태일 목사 2022-01-06 608
1220 주일설교 주님주시는 평안과 소망으로 선교적 삶을 살자 (벧전 2:9) 한태일 목사 2022-01-05 607
1219 주일설교 하나님 앞에 성결하십니까? (출 39:27-31) 한태일 목사 2021-12-26 707
1218 주일설교 무궁한 평강을 더하는 하나님의 열심 (사 9:6-7) 한태일 목사 2021-12-19 855
1217 수요설교 임마누엘의 성탄 (요 1:14) 한태일 목사 2021-12-16 603
1216 주일설교 화목하게 하는 직책 (고후 5:18-21) 한태일 목사 2021-12-12 737
12345678910,,,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