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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1-06 (목) 12:07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651    
서로 비방하지 말라 (약 4:11-12)
제가 새가족반을 인도하면서 마지막 시간에 꼭 주의를 요하는 말이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의 흉을 보지도 말고, 그런 대화에 참여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다른 성도들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면 좋은 데,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점을, 물론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기도 합니다. 사실이 아닌데도, 재미로 말입니다. 죄성이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사람의 흉을 보는 분들은 여러분에 대하여서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흉을 볼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버릇을 고치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교회를 힘들게 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본인 앞에서도 조심하라고 합니다. 판단하고 비난하지 말라고 합니다. 형제, 자매들 흉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4장 1-5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잘못된 기도를 설명하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욕심이 많아서 기도하지 않거나,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자기 정욕대로, 이기적으로 하는 기도는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워 달라고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응답이 없습니다. 그리고 6절 이하에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10절)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비방하지 말아야할 이유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11절) 하였습니다. 한절 말씀에 ‘형제들’이라는 단어를 세 번씩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 주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룬 형제요, 자매라는 말씀입니다. 한 가족이 되었는데 피차에 비방하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안된다는 말입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친밀한 관계는 깨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본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말입니다. 성도들이 형제나 자매를 비방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물론 형제, 자매가 잘못할 때 아무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잘 권면해주어야 합니다. 신앙적인 조언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판단하여 흉보는 것을 뜻합니다. 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며 흉보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것이지요. 그 사람을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비방하지 않습니다.

왜 형제, 자매를 나름대로 판단해서 비방하는 것이 문제입니까? 첫째는, 그것이 곧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절에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 율법은 형제 사랑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하노라”(갈 5:14-15)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나름대로 판단하여 비방하는 것은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아니 가장 큰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11절하)고 한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우리가 율법을 재판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율법 위에서 주장한다는, 재판한다는 것입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최고인데, 우리가 그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판단하고 재판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법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12절)고 한 것입니다. 도대체 네가 누구길래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비방하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사람을 판단하여 구원하시기도 하며 멸하시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서리라”(롬 14:10)고 하였습니다.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주로 자신들에게는 율법을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해서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스스로에게는 문제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은 겉으로 적당하게 의를 행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함으로서 죄의식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성경에는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여러분이 너무 잘 아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1-4)고 하셨습니다. 아니 구약에도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6)고 하였습니다. 여기 논단은 비방(slander)를 말합니다.
혹시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서 정죄하지 않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시고 성경 66권을 주신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심을 잊고, 우리가 그 자리에서 심판하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우리보다 낮게 보면서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며 비판하지는 않습니까? 내 눈의 가시는 못 해결하면서 다른 형제의 들보를 빼내려 하지는 않습니까?  
정말 누구를 흉을 보며, 비방하고, gossip 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더군다나 사실이 아닌 소문을 사실인양 말한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서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서로 비방하는 것은 가족의 친밀한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온 율법의 대 강령인 사랑의 법을 법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판단하는 자가 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재판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그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다 잘못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신앙양심’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다 신앙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기에 말입니다. 부패한 양심이 회복이 되어 그 심령에 새겨진 것입니다. 사실 새 언약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그 법을 마음에 새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렘 31:33).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모든 말과 행동을 죄악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 바로 마음에 새겨진 성령의 법입니다. 온전히 성령의 뜻에 일치하기까지 성령은 우리 안에서 계속 갈등과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양심과 다른 신앙양심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말의 실수를 전혀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번도 우리의 형제, 자매를 판단하여 비방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점점 줄어져야 합니다. 막 하려고 할 때, 생각이 떠오를 때 멈추어야 합니다. 신앙양심이 작동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신앙양심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작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고통스러워 하고 애통해 하면서 회개하게 하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양심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양심의 작동이 없다면, 형제, 자매를 비방하고 흉을 보고 다니면서도 뻔뻔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계속 한다면 정말 문제가 심각합니다. 어쩌면 믿음이 바닥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가 임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모두는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신앙양심이 늘 작동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대로 돌이켜 회개하고, 늘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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