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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8-04-09 (월) 11:32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054    
우리가 씻었으니(히 10:19-25)


우리가 어떤 권한을 위임을 받으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이, 의무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로서 특권을 누리는 것이 은혜이며 복이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는데 바로 주님을 의지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동안 우리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탁월하심을 계속 강조하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하지 말라(2:1-4), 40년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3:7-19), 신앙이 자라가는 것을 방해하지 마라(5:11-6:20),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라 등이었습니다. 이제 네 번째 경고가 믿음에 굳게 서라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10:19-39).

우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9-20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는 앞절(10:1-18) 문맥상 예수님께서 하신 구속사역을 말합니다. 19절에서 다시 설명하기를 예수의 피라고 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한 주님의 육체적인 희생입니다. 20절에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았던 휘장이 찢어져 가운데로 열어 놓은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길(way)은 새롭고 산 길이라고 했는데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소 곧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성소에 얼마든지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또한 우리 예수님은 여전히 위대한 대제사장으로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시니 우리가 죄 씻음을 받았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있으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1-22절) 하였습니다. 여기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는 성령세례를 받았기에 물세례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라고 한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참 마음, 순수한 마음과 복음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사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새 언약을 예언할 때에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하나님에게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을 견고히 붙들어야 합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23절) 하였습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번역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소망입니다. 내적으로 믿는 소망과 외적으로 고백하는 소망에 대하여 흔들리지 말고 굳게 붙들라고 합니다. 약속하신 주님이 신실하니 말입니다. 너무나도 확실한 소망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힘들어도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우리 개혁주의 성도들이라고 해서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며, 인내하게 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공동체로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서로 돌아보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24-25절)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처럼 그 때도 모이지 말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모이지를 않으면 어떻게 사랑을 하며, 선행을 합니까?
사실 이웃의 연약함을 볼 때에 제일 먼저 우리가 쉽게 보이는 반응은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에 필요한 자세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며,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공동체 전체,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접고 본질적인 것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비본질적인 것에, 사소한 것에, 인간의 교만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에 빠져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모이는지 그 목적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하여, 그 의와 나라를 위하여 모이는 공동체라면,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어떻게 말씀을 더 잘 배우고 순종할 것인가, 어떻게 이웃을 더 사랑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기호대로 신앙생활하지 않고, 남을 위한, 이웃을 위한 삶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본질적인 것에 대하여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하여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일에 사랑으로”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보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세가 바로 격려입니다. 그저 소극적으로 마지못해 받아주는 것은 참된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더더욱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로 힘들어 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이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고난의 여정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은 고난과 핍박에 직면해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의 종류는 달라도 1세기 때보다 훨씬 복잡하고 타락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관심을 가지고 자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격려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규칙적인 모임이 필요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무서운 핍박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비밀은 규칙적인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자꾸 모이지 말자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하지 말고,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더욱 자주 만남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임에서 어떤 내용의 격려들이 있어야 할까요? 무슨 말로 격려해야 할까요? 때로는 격려하기 모인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습니다. 사탄 마귀가 하는 일이지요. 어쩌면 그래서 모이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큰 자동차 사고가 난 후에 겁이 나서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일수록 다시 핸들을 잡아야 합니다. 정신적인 상처, 심리적인 상처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분은 앞으로 다시는 운전을 할 수 없게 되고, 그의 삶은 너무나 불편해질 것이고, 많은 유익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임에서 어느 분의 실수로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교제를 더 이상 못하게 되며, 많은 영적인 유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사람 자신의 손해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임을 생산적으로 이끌어 가는 격려의 모임이 되려면 어떤 내용의 대화를 나눌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무슨 대화를 주로 나누어야 할까요? 정치이야기? 사업이야기? 스포츠나 연예인 이야기? 물론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모임의 주제가 되면 안됩니다. 우리의 모임은 단순한 사람과의 만남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이 전제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모임에 적합한 주제는 세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 입니다. 이 세가지야 말로 이웃을 격려할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믿음을, 소망을, 사랑을 말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다 보면 어린 시절에 몇 가지 중요한 좋은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가 깨닫게 됩니다. 교회에 예배를 드리며, 성경공부 하러 가는 습관, QT하는 습관, 공부하는 습관, 절약하는 습관, 이웃을 섬기는 습관 등등 말입니다. 솔직히 이런 것들만 제대로 해줘도 자녀 교육은 다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왜 힘이 듭니까? 문제는 자녀들이 안 좋은 습관부터 먼저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죄인이기에 예배 드리지 않고, 성경공부하러 가지 않으려는 습관, QT 안 하는 습관, 공부 안하고 노는데 열심인 습관, 낭비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습관 등을 자연스럽게 너무 쉽게 배우지 않습니까?
우리는 안 좋은 신앙습관을 가진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누구와 신앙생활을 함께 하느냐가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역장님들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 너무 중요합니다. 본문 2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이기를 싫어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본을 보이는 분들을 바라보고 따라야 합니다. 아니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무슨 말을 하고 사셨는지 잘 보셔야 합니다. 복음서를 자주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실로 위대한 격려자였습니다. 특히 고난 받고, 버림 받는 자들의 친구였습니다. 아파하는 자들을 아시고 치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위대한 일들을 감당하게 된 것이 그의 인생에서 바나바라고 하는 격려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되었을 때에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믿어준 단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청년 바울을 믿어주고 ‘함께 일하자’고 하면서 격려한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마침내 세계 선교의 지도력을 그에게 위임하고 조용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그야말로 이름처럼 ‘격려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바나바가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중에 그를 따르던 디모데와 같은 많은 동역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격려를 바나바로부터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격려를 받아본 사람이 격려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몸을 깨끗이 씻었다면, 세상을 살면서 더럽혀진 발을 씻어야 합니다. 신앙양심에 거스리는 악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신다면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주리라”(렘 29:13)고 하셨습니다.
금번 부흥사경회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송이꿀보다 더 달고 유익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해야 합니다.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세상을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 약속에 대한 소망을 굳게 믿고 입으로 고백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흔들리면 안됩니다.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자주 모여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말을 하며, 선한 행동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하여 비방이나 조롱하거나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어야 합니다. 믿는 우리의 책임이요 의무입니다. 악한 영의 유혹을 받지 마시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가든교회 가족들에게 이러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모습이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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