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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2-24 (월) 06:26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99    
사랑하면 아깝지 않습니다 (눅 7:36-50)



‘은혜(grace)’와 ‘사랑(love)’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처럼 참된 사랑은 은혜를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그의 약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합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비방하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이런 사랑을, 은혜를 깨닫고 누리au 사는 성도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우리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의 음성에도, 예수님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31-35절).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기적들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을 받았을 때에도 기꺼이 식사를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무 차별이 없이 거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던 주님이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은혜를 베풀며 사랑을 주기 위하여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35절) 하였습니다. 문맥상 이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그저 랍비 중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초청하였던 것입니다(39절, 44-46절).
그런데 이 때 초청을 받지 않은 그 동네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이 그 집에 앉아계심을 알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씻기며,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붓습니다(37-38절). 다른 복음서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마 26:6-13; 막 14:3-9, 요 12:1-8).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 나온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마지막 부분으로, 베다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사건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있었으며 예수님 공생애 사역 초기에 일어난 것이니 전혀 별개입니다. 물론 공통점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를 담은 옥함을 깨뜨려 예수님에게 부었던 것입니다. 눈물로 발을 씻겼던 것입니다. 사실 당시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은 그 집 주인이 하인을 시켜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자신의 집에 초청을 받지도 않은 그 동네 죄인인 한 여자의 행동을 보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예수가 만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면 자신에게 이렇게 하는 여자가 죄인인줄 알텐데 라고 말입니다(39절). 아니 어쩌면 ‘이 예수가 누구길래 이 여자는 마치 하나님에게 하듯 그를 숭배하는가’ 의아했을 것입니다. 여기 ‘죄인’의 의미는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성적인 죄를 지은 ‘창녀’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그에게 짧은 비유의 말씀으로 질문을 하십니다(40절).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니라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41-42절)? 즉 어떤 부자가 두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당시 보통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에게는 노동자가 일년 반을 일해야 버는 돈이었고(오늘날 환산하면 약 $60,000), 다른 한 사람은 약 두 달 일하여 버는 돈(약 $6,000)을 빌려준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갚을 길이 없어 힘들어 하니 불쌍히 여겨서 둘 다 다 탕감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더 빌려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시몬의 대답이 당연히 더 많이 탕감을 받은 자라고 하였더니 예수님께서 옳다고 합니다(43절). 여기 우리말에 ‘탕감받다(graciously forgave)’라는 원어는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죄 사함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골 2:13)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도 아니하였으며 저는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4-46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의를 내세우며 교만한 바리새인과 죄인된 한 여자를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시몬은 선지자로조차 인정하지 않기에, 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손님에게 베풀어야 할 기본적인 예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손님의 발을 씻어주라고 하인에게 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손님의 머리에 붓는 감람유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입맞춤의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이 여자는 들어올 때부터 발에 입맞추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자신을 종으로 비하시키면서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주석에서 이 여자의 눈물은 ‘heart water(마음의 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심령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입니다. 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 계속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로 적시며 머리털로 발을 씻었겠습니까? 여자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자신의 인격을, 품격을 나타내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얼마나 신경을 쓰는 부분입니까? 바울은 여자의 긴 머리가 자신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1:15). 그런데 머리털로 더러운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추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왜 두 사람이 이렇게 다릅니까?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므로 내가 내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7절)고 하셨습니다. 여기 죄가 ‘사하여졌다’는 동사는 완료형으로 쓰였습니다. 이미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입고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머리털로 발을 씻기고, 입맞추고, 향유로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것도 많이 사랑하기에 하나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고, 죄 사함도 받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을 사랑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감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합니다. 주님의 더러운 발을 눈물로 머리털을 가지고 씻기고, 입을 맞추어도 좋습니다. 기쁨으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작은 것도 드리기에 아까운 것입니다. 도저히 주님의 더러운 발을 씻길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입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48-49절)고 하였습니다. 지금 사도 누가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독자들에게 다시금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 지금 벌어진 사건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랍비 정도로 알고 있으니 어떻게 예수님이 죄를 사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예수님을 기이하게 여길 뿐입니다.
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50절)고 하십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여자가 구원을 받은 것이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여 눈물로, 머리털로 발을 씻기고, 향유를 머리에 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믿음이 있어서 구원을 받았기에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 은혜에, 사랑에 감사하여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위해 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정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은혜를 받았습니까? 하나 밖에 없는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가짜가 아닌, 가장하는 것이 아닌, 진짜로,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주로 믿는 자로서 증거가 무엇입니까? 변화된 삶입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사랑의 대상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세상을 사랑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합니다. 전에는 나 밖에 몰랐는데, 내 자신을 사랑했는데, 이제는 이웃들이 보이고, 그들을 사랑합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죄 사함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더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바리새인 시몬처럼 자신은 별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한 여자처럼 자신의 죄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사실 몰라서 그렇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기에 그렇습니다. 율법(말씀)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깨닫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다 드리게 됩니다. 다 드려도 부족하여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온 몸을 다해 사랑합니다. 이것이 참된 헌신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사랑한다면 다 주어도 아깝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온통 사랑하는 사람에게 쏠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부모도 자식을 사랑하기에 아낌없이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줄 수 있어서 기쁘지요.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인가를 주면서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자식 사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너무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살면서 서로에게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처음 사랑할 때 그렇게 다 내어주지 않았습니까? 주는 것이 기쁘지 않았습니까? 더 못해 주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살다 보니 아내에게, 남편에게 무엇인가를 주면서 아깝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사랑이 없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를 위하여 다 내어주시며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을 아는 사람의 기쁨은 그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깝지 않고 오히려 더 못 드려 죄송한 마음입니다. 이런 찬송 기억하십니까?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친 후에 주와 온전히 사귀겠네
주의 주신 기쁨 또한 그의 사랑 어찌 말로다 형용하랴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네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모든 것을 다 드리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부으십니다. 자식이 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감격하며 사랑하기에 자신의 것을 다 주려고 할 때에, 그것을 받는 부모는 너무 기뻐서 능력이 있다면 더 많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 능력에 한계가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으로 얼마든지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부으실 수 있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은혜를 베푸시며 십자가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고, 그 은혜가 우리에게 부은 바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래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기대대로 살아가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울었던 곳에서 우리도 울고, 주님이 분노했던 죄에 대하여 우리도 분노하고, 주님이 일하던 곳에서 우리도 일하고,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도 사랑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는 자로서 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더욱 주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고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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