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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4-07 (화) 05:17
분 류 특별설교
ㆍ조회: 71    
배신하지 마십시오 (요 18:12-27)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둘째날 (4/7)
우리 인생살이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때는 믿고 사랑하던 사람이 배신하고 떠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때에 가장 큰 고통을 느끼며 가슴앓이를 합니다. 반대로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신실할 때, 충성스러울 때에는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하지만 배신을 당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과 슬픔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본문 18장은 마치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제 1막은 어제 새벽에 살펴본 앞선 단락(1-11 절)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가 되어 한 밤 중에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오르셔서 기도를 하시고 나자, 가롯 유다가 로마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I AM)’으로 나타내시자, 그들이 놀라서 다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스스로 자청하여 체포를 당하십니다. 비록 베드로가 기질을 부려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시고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습니다.
제 2막은 그 로마 군대와 천부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을 하고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서 우리 주님이 첫 종교재판을 받게 되는 장면입니다(12-13절). 안나스는 주후 6년부터 15년까지 약 9년 동안 대제사장이었으나 지금은 주후 18년에 임명을 받은 그의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스는 당시 유대교의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정권과 결탁하여 자기 아들 넷과 사위를 대제사장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예수님이 받는 종교재판은 너무 불법적인 요소가 많았습니다. 우선 지금 대제사장이 아닌 안나스에게는 갈 이유가 없는데 그 앞에 끌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한 밤중에 사람을 체포하고 심문하는 것도 유대법에 의하면 불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심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간접적으로 답을 하신 것입니다(19-21절).
제 3막은 예수님의 수석제자 베드로가 또 다른 제자 하나, 즉 요한과 함께 멀리서 예수님을 따라 안나스의 집까지 온 것입니다(15절).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하였지만 그래도 베드로와 요한은 체포당하신 주님을 좇아온 것입니다. 문제는 요한은 어머니 살로메가 제사장 가문이었기에 안면이 있어 안나스의 집 뜰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베드로는 못 들어가고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16절). 그래서 요한이 나가서 문을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문을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에 “나는 아니라”라고 하였습니다(17절). 그리고는 예수님을 체포해온 부류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까 자기도 함께 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18절).
제 4막은 안나스가 잡혀온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입니다(19-24절). 그가 예수님에게 그 제자들과 가르침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님께서 이미 3년 동안 비밀스럽게 가르친 것이 아니고 다 드러내고 유대인의 회당과 성전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고 하시면서,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안나스의 종 하나가 예수님의 얼굴을 손으로 치면서 어떻게 대제사장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대답하느냐고 합니다. 이것도 불법입니다. 유대법에 의하면 재판하는 도중에, 결코 죄가 확정되지 않는 한 때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죄가 확정이 되려면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이 있으면 증거를 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어서 안나스는 당시 진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예수님을 보낸 것입니다(24절).
제 5막은 베드로가 안나스 집 뜰에서 그 종들과 함께 숯불을 쬐고 있을 때에 사람들이 그에게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또 물었습니다(25절). 그 때에도 베드로가 또 부인하여 “나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뿔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일가친척이 되는 한 사람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또 증거합니다(26절). 그러자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다고 하였습니다(마 26:74). 아마 욕을 하고 침을 뱉으면서 부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곧 닭이 울었다고 하였습니다(27절). 예수님께서 예언한 그대로 말입니다(요 13:18).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정말 영화나 연극의 장면과도 같은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느끼게 되고 생각하게 됩니까? 저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아주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불법 종교재판을 받으시면서도 옳은 말씀만 하실 뿐 담대히 재판에 임하는 모습입니다.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시고자 하시는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비겁하게 고난을 피하려 하거나 분쟁을 일으키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하셨고, 또 자신은 억울하게 죽어가더라도 우리에게는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인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 후에 부활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잘 참고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키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아 멘!

한편 베드로를 생각해 봅시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사랑하는 자가 배신을 할 때 받는 고통은 그 어떤 고통보다 큰 데, 우리 모두는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주님께 사랑을 받고 있는 제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고 오히려 신실하게 충성하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가 배신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돌아서면, 말씀에 불순종하면 주님께는 큰 고통이요 상처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로부터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지옥으로 향하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엄청난 고난을, 수욕을 참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어려울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며,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받은 자라면 주님에게 많은 영광을 돌려드리지는 못해도, 적어도 주님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죄 가운데 삶으로 계속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야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왜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도하지 않아서 부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처럼 함께 기도했더라면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힘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순종의 능력은 내가 이를 악물고 결심한다고, 내 의지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단단히 결심을 해도 주님께서 순종할 능력을,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시면 못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는 모습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주를 버려도 ‘나’ 자신은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주님에게 말한 것이 몇 시간이 지났습니까? 문제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습니다. 내 힘과 능력, 내 지혜와 내 의지를 강조하니까 넘어진 것입니다. 교만이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 가지고 있는 것 믿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해도 형식적으로 합니다. 베드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지만 믿었습니다. 자기 칼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종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자리를 떠날 때, 기도하지 않을 때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주님을 부인했을 때 아마도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는 큰 목소리가 주님의 귀에도 들렸던 것 같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눈과 주님의 눈이 마주친 것입니다. 눈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가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그 때 베드로의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가슴이 철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몇 시간 전에 주님께서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눅 22:61)경고한 말씀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눅 22:62).

사랑하는 여러분!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말합니다. 잠시 잠깐 연약하여, 사탄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주님을 부인하는 생각을 가질 지는 몰라도 즉시로 회개하고 주님을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어려움이 닥칠 때, 억울한 일을 만날 때 주님을 시인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신자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고난 가운데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나의 주님입니다’’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이 진짜 신자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고백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고백이요, 우리 주님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배신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아니 주님을 향한 사랑을 끄지 마십시오. 그 사랑을 불태우십시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고전 13:8)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은 언제든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감정만 좀 상해도 떨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그 사랑을 경험한 자들은 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우리 주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생명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워 주셔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달게 지시기를 바랍니다. 어렵고 힘들 때 떠나지 않고 함께 남아서 고통을 나누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주님의 제자가, 주님의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에게 만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형제, 자매들 관계 속에서도 결코 배신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어려울수록 더욱 교회를 지키는 참된 교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지키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 형제나 자매가 어려울 때에 떠나지 않고 지켜주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최후에 웃는 자가 되려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아니 어느 자리에서든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고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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