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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1-06-17 (목) 05:56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768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약 2:1-7)



이 세상에는 빈부의 격차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다르게 봅니다. 차별합니다. 부자들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그냥 불쌍히 여기고 동정할 뿐입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까이 하기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러면 곤란하겠지요.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면 안되겠지요. 뿐만 아니라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세상 지식이 많은 사람과 공부를 못해서 무식한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됩니다. 얼굴과 몸매가 잘 생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차별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인종 차별하는 사람을 싫어하듯이, 우리는 백인이라고 흑인이라고, Spanish 혹은 Indian 이라고, 중국인이나 일본인이라고 차별해서도 안됩니다. 결코 그 사람의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신 10:17)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인용하여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행 10:34) 하였고, 바울도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 2:11)고 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3년 간의 공생애 사역을 살펴보면   그 누구도 외모를 보고 차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누구나 자기에게 오는 자를 다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나쁜, 악한 생각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4절).

그런데 아마도 초대교회 안에서 이런 모습이 약간 드러났거나,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1절)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영광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영광스러운 주님이 어디나 함께 하는 곳에서는 누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취하면 영광의 주님을 믿지 않는다는 표시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2-4절)라고 합니다. 당시의 부자들의 표시는 금반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이었나 봅니다. 오늘날도 귀한 보석으로 치장하고 명품 옷이나 가방, 구두를 신으면 일단 부자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 사람이 회당에 들어올 때 안내위원이 좋은 자리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그 부자가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물론 믿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겠지요. 하나님을 예배하러 오니 말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6절하)는 말씀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 부자들은 교인들을 압제하며 자주 고소하여 법정으로 끌고 갔던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교회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7절)라고 한 것처럼, 아름다운 예수님의 이름을 비방하고 모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자가 교회를 나오는 것은 자기가 부자인 것을 과시하며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하여 거드름을 피우며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부자에게 교회에서 특별 대우를 하면 그 영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대로 더러운 옷을 입고 교회에 나오는 가난한 자에게는 안내위원이 그냥 서서 예배를 드리던지, 땅 바닥에 앉으라고 하면 그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물론 이 사람도 믿는 자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참 믿음이 있는 자라면 상관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겠지요. 우리 하나님이 다 아시니까요? 하지만 믿지 않는 가난한 자가 교회를 찾아왔다면 또 오려고 하겠습니까? 주님을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4절)라고 수사학적인 질문 형식으로 강하게 꾸짖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인들이 서로 외모로 판단하는 것을, 차별하는 것을 악한 생각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탄 마귀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만약 믿지 않는 부자가 교회를 찾았다면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 아픔이 있어 위로 받기를 원하거나, 인생 무상을 깨닫고 무엇인가 의미 있는 삶을 살아보려고 하나님을 찾아 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도 문제가 있어서 왔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있는데 왜 교회를 찾겠습니까? 겉치장은 화려하게 했어도 그 마음 깊은 곳에 공허한 부분이 있어서 인격적인 교제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믿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차별 대우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뭐 세상이나 교회나 별 차이가 없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더 교회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도 존중하면서 교회는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돈이 없다고 괄시를 받고 무시당하고 사는데 교회에서까지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다시는 교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찾지 않을 것입니다. 가난하던 부자던 차별 없이 누구나 주님이 필요한 것을 기억하고, 누구나 문제를 가지고 있고 어려움과 어떤 필요가 있어서 주님이 채워주셔야 할 것을 알고 믿음이 있는 교인들이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가 교회다운 것이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5절)라고 하였습니다. 즉 가난한 자를 무시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되는 까닭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있어서는 부요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가난한 자는 다 믿음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믿음이 부요하기 어렵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을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무래도 돈이든 무엇이든 의지할 것이 있는 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기 어렵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지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중에 심령이 가난해진 사람은 쉽게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별 볼이 없고 쓸모가 없게 보일지 몰라도 이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약속하신 나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이 될 때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마음 아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을,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도 여러 가지 각도로 보아야 합니다. 외적은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 각자 다 넉넉한 부분도 있고, 부족한 부분도 있어서 세상적으로 가난해 보여도 믿음에는 큰 믿음을 가진 자가 있고, 사실 그런 분이 하나님 나라에서 더 큰 자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명한 중세수도사였던 St. Francesco 는 가난이 참된 신앙을 만들어낸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부가 교회나 신자를 타락시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난의 고통이 큰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신앙은 외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풍부한 가운데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이 없어서 낮아지고 낮아질 때, 비천하고 가슴 아픈 경험을 통하여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마 5:3). 모든 것이 넉넉한 가운데서는 위대한 신앙이 만들어지기가 힘듭니다. 물론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하면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인이 단지 사람의 외적인 것만 보고 어떤 사람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무시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악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보지 않았지만, 본문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8-9절)고 하였습니다. 마음과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지상 최대의 계명에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바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율법에 명한 간음하는 것이나 살인하는 것과 마찬가지 죄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며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실패하여 죄를 짓는 것이기에, 가장 큰 계명을 어긴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여튼 누구든, 어떻든 차별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종적으로나, 빈부의 차이로나, 남성/여성의 차이로나 차별하면 안됩니다. 우리 예수님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모습 그대로 용납하고 이해하면서, 누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요,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필요한 사람인 것을 알고 도와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용납하는 것입니다. 받아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용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언급했듯이 단지 내 기준으로만 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를 범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누구를 판단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고 한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시험과 고통을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다 아시기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구든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어 함께 하면서 인격적인 교제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친구가 되어줘야 합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아무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절대로 사람의 외모를 보고, 외적인 것만 보고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차별을 당하고 사는 것도 억울하고 힘든데 교회 안에서조차 그렇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결코 편애하거나 당을 짓거나 하면 안됩니다. 사탄 마귀의 수작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누구나 사랑해야 합니다. 늘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하십시오. 아니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주신 새 계명을 기억하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습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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