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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3-27 (일) 02:51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549    
어떤 실수를 하셨나요? (눅 22:54-62)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선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이 없이 구원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도 없고, 죽음을 이기는 승리나 천국에 대한 기대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실 때에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출 34:6하-7상) 라고 하였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 7:8) 라고 하였으며, 사도 요한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하는 사건은 분명히 비극적인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 베드로의 회개, 그리고 잠시 후 오순절에 심령이 회복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잠시, 일시적인 실수, 혹은 실패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큰 지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성도는 주님 앞에 연약하여 때때로 실수로 지은 죄 혹은 짓는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무겁고 애통함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험이 전혀 혹은 종종 없다면 영적으로 냉랭한 상태가 아니면, 성령을 받지 못한 신자가 아닌 증거입니다. 신자라면 자신이 한 말이나 행동이 주님을 부인한 것인 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 때문에 주께 자백하고 회개할 때에 주께서 허락하시는 용서를 체험할 때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속에서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 멘!

우선, 본문의 베드로가 실패하게 된 원인을 잠시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미 그 동안 몇 주에 걸쳐 누가복음 22장을 강해하면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다시 한번 복습하면서, 주의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듯이 당시의 베드로는 결함있는 신자로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을 부인하는 하게 된 첫번째 걸음은 제자들이 다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33절), 혹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라고 자만한 것입니다.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그 입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데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두번째 걸음은 기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만과 불복종하는 것이 결국 기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써 기도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라고 했는데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명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46절)고 하셨습니다. 세번째 걸음은 자기 힘으로 혼자서 할 수 있다는 마음과 자기 의로 말미암은 충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혈기를 앞세우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제사장들과 군인들 앞에서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치는 베드로였습니다(50절). 이미 주님께서 자주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은 자신이 붙잡히게 되어 죽게 되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이야기하였지만 믿지를 못하고, 정말 예수님께서 붙잡히게 되는 모습을 보자 자신의 검으로 주님을 구할 듯이, 충동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네번째 단계는 자신을 영적으로 위험한 곳에 방치함으로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까지 쫓아가서 앉아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피하였어야 하였는데, 분명히 자기를 알아볼 사람이 많은 곳에 가 앉아 여종과 많은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였느냐 말입니다. 아직 그의 믿음은 시험을 이길만한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고전 10:13상) 라는 말씀은, 이렇게 베드로처럼 의지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상황에는 적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아(ego)와 자만에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뜻과 자기 혈기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큰 죄를 지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의 드라마를 살펴봅시다. 십자가 죽음까지 예수님은 모두 여섯 번의 재판(심문)을 받게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성전 군관들, 백성의 장로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먼저 안나 대제사장에게 데려가 심문을 받습니다(요 18:12-23). 그리고 나서 그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 일을 감당하던 사위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가야바 대제사장 집입니다(54절). 베드로가 그 집의 바깥 뜰에 앉았을 때에 한 비자(여종)이 그를 주목하고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56절하) 하니까, 베드로가 처음으로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 여종의 말을 부인하며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57절하) 하면서, 앞 문으로 도망갑니다(마 26:71). 그러자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그 당이라”(58절) 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창피하게 모욕합니다(마 26:71). 그러자 “나는 아니로라”고 두번째로 부인합니다. 마태는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2)고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맹세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그 거룩하신 이름을 걸고’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베드로는 하나님을 그의 거짓말에 증인으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습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두번째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한 시간쯤 흐른 후에 또 한 사람이 장담하면서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59절). 베드로가 갈릴리 사투리를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김새도 분명하지만 말소리가 더욱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정말 영적 밑바닥에 내려갑니다.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60절상)고 세 번째 부인하는데, 마태는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4)고 하였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맹세할 뿐 아니라 이제는 자신을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여기 ‘저주하다’는 말는 ‘내가 만약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죽여도 마땅하다’ 라는 뜻입니다. 즉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시며 나를 저주하실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경종이 됩니다. 이 순간에는 베드로에게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 순간 보고 계시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어두어져 모든 영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그 세번째 부인을 하고 나자 곧 닭이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60절하).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얼마 전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34절) 닭이 울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61-62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시니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되었습니다. 여기 “보시니(evmble,pw, look at)” 라는 단어는 ‘직시하다’는 뜻입니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자 주님의 꿰뚫어 보시는 눈과 마주친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e;klausen, wept)고 합니다. 대성통곡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닭이 울게 하시고, 베드로로 하여금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회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닭이 울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화인 받은 양심인지, 버림받은 인생인지 말입니다.
저는 베드로의 참 모습은 바로 이 심히 통곡함에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큰 고통을 가져다 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심령이 변화하게 됩니다. 가롯 유다와는 달리 믿음으로 주께 돌아옵니다. 그의 작은 믿음이 잠시 연약해져서 미끄러지게 되었으나, 그 작은 믿음은 진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 스스로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기에 회복이 가능하였습니다(32절).
자신의 구세주의 사랑과 은혜에 압도되어 자신의 죄, 신실하지 못하였음을 깨닫고는 주체를 못하고 나가서 심히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어디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도 기도할 필요가 있었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곳이 어디였든지 간에 베드로는 홀로 죄를 고백하며, 주께 용서를 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용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씩이나 물어보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요 21:15절 이하). 분명히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야바 제사장의 뜰까지 좇아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사랑했기에 그렇게 심히 통곡하였지요. 이미 알고 게신 주님께서 물어보신 것이지요. 그런데 그 귀한 용서를 체험하고 나서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주의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그토록 사랑을 받으며 수석 제자 노릇을 하였던 베드로가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세번이나 부인한 이 유명한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진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자신을 믿는 자만(self-trust)에 대하여, 하나님 말씀에 불복종 혹은 불신앙에 대하여, 기도로 준비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와 죄 지은 성도를 회복시키심에 대하여 깊은 교훈을 줍니다.
이 사건 이후로 베드로는 아마 다시는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불순종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확신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간구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더욱 힘을 내어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에 베드로는 죽음을 앞에 놓고, 아마도 가야바 제사장 집 뜰에서 있었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카타콤과 같은 지하무덤 땅굴에서 믿음을 지키며 신앙생활하던 성도들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7-18)라고 하였습니다. 삼가라, 주의하라!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실수를 하셨나요? 누구나 실수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영적 회복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는 데서 시작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눈과 마주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사인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연약해질 수 있는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진짜이면, 성령님의 깨우침으로 회개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습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일시적인 실패였습니다. 잠시였습니다. 회개하고 크신 은혜를 체험한 후,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이후로는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큰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이미 용서하시고 사랑하느냐 물어봐 주신 주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일평생 주님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가롯 유다의 실패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하십니까? 지금도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요 17:20).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고 하였습니다. 넘어지면 일어설 수 있도록,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한 기도에 힘입어, 만약 연약한 믿음으로 넘어지더라도 회개하여 심령이 변화를 받아 무엇인가 달라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시적인 실수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돌이킴으로 회복하여서 주님에게 온전히 헌신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신앙생활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기를, 역동적이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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