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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4-16 (토) 06:13
분 류 절기설교
ㆍ조회: 110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4-49)
[정사기념예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약 3시간 정도 지났을 때 시간, 바로 해가 중천에 떠오르는 정오에 갑자기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실 때까지 온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44절). 십자가 상에서 또 3시간 가량 흐르자 예수님께서 영혼과 육신의 극심한 고통 가운데 숨을 거두시게 되는데, 그 때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지는 기적과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새벽에 살펴본 십자가 상의 5번째 “내가 목마르다”(요 19:28)라고 말씀하시고, 6번째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외치자, 성소 휘장이 찢어지면서(45절)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46절)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나서, 예수님의 영혼이 육신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의하면 큰 소리로 마지막 유언을 하시고 나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마 27:50-51; 막 15:37-38). 그러니까 아마도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전까지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Day of Atonement)에만 지성소의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법궤)가 있었습니다. 대속죄일에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언약궤가 놓여있는 속죄소에 뿌렸던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일시적으로 사하는 상징적인 예식이었습니다. 바로 2000여년 전 오늘 흘리신 십자가의 피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자 그 휘장이 찢어져 둘로 나뉘어져 버렸습니다. 사실 이 휘장은 상당히 단단하게 짜였었습니다. 큰 황소를 양쪽에 밧줄로 잡아매고 각기 반대편으로 모진 채찍질을 하여 달리게 하여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단단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얼마나 굳게 차단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율법이 다스리고 죄가 지배하며 하나님의 완전한 속죄가 없었던 그 시대에,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거의 불가능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만약 자격이 없는 사람이 함부로 지성소에 접근하면 반드시 죽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도 죄인이었기에 그도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속죄의 피 뿌림이 있어야 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예배를 드릴 때, 기도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성소의 휘장을 열었던 대제사장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이 영적으로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가를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이제 매년 희생 제사를 드리던 율법의 의식은 필요 없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예수)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예식)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 2:14-16)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하여 그를 믿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지성소 안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중보자인 대제사장이 대신하여 간접적으로 만나지만, 이제는 죄 용서를 비는 것도,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도 직접 나아가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고해성사와 같은 것은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예수)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예수님)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함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고 하였습니다. 죄인된 우리가 직접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또,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시간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마 27:51절하). 땅이 진동하고 바위들이 갈라졌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십계명을 받을 때에 지진이 일어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그렇게 버리시고 저주에 이르도록 하심이 그토록 마음이 아프시고, 진노하셔서 일으키신 지진으로 여겨집니다. 훗날 나타날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히 12:26-27)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이처럼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며, 지진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던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6시간 동안 못 박히신 몸의 피와 물을 다 쏟으셔서, 이제는 말할 힘도 없으실텐데 어떻게 큰 소리로 부르짖을 수 있었을까 놀라게 됩니다. 아마 그렇게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내용의 기도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 습관적으로 부르짖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은 간절함이 없는데 육신적으로 늘 하던 대로 소리지르며 부르짖는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심령의 간절한 호소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큰 부르짖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공생애 사역을 금식하며 기도로 시작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첫 유언의 말씀도 죄인들을 위한 기도였고, 운명하시기 바로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일생일대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죽음의 순간에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평생의 삶이 기도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인생의 마지막을 기도로 마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숨을 거두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죽기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그런 간절한 기도 생활이 없는 분들은 결코 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은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처럼 마지막이 영혼을 위한 기도가 되려면 평소에 우리의 영혼을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내 영혼이, 내 심령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로 가까이 동행해야 그렇게 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부탁한 것을 보면, 앞으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변하고 다 사라지지만 우리들에게 변하지 않는 관계가 있는데, 바로 우리의 영혼과 그 영혼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연 많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하나님 앞에 갈 때에 그 길은 ‘홀로’ 걸어가는 길입니다. 혼자 가는 것입니다. 동행하는 이는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아내도, 남편도, 부모도, 자녀도, 친한 친구도 아닙니다. 하나님 보좌에 도달했을 때에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 계시고 홀로 서 있을 우리의 영혼입니다. 육신은 우리의 영혼이 잠시 깃드는 장막일 뿐 결국은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영혼은 안녕합니까? 우리의 영혼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기쁨과 평강이 넘쳐야, 오늘 밤에 이 세상을 떠나도 아무런 미련 없이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겠지요. 그래야 예수님처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스데반 집사처럼,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 앞에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59, 60)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태까지 되어진 일과 예수님의 놀라운 십자가 상의 칠언과 해가 빛을 잃고 어두운 가운데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본 로마 군대 백부장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7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오직 예수님 만이 의인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었으나 예수님의 재판과 십자가의 길을 옆에서 지켜본 그가 회심을 하며, 변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 사건이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에 누가는 거기 모인 무리들과 예수님을 알았던 자들, 갈릴리에서 따라온 자들이 슬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48-49절).

여러분! 오늘날도 그렇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당시 세상은 어두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도, 제사장들도, 서기관들도, 정치가들도 모두 한 가지로 치우쳐 어두움을 사랑하고 어두움의 일을 행하였습니다. 오늘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어두움은 바로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육신의 눈으로도 볼 수 있도록 베풀어주신 교훈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인도하시는 빛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등불이 되는 진리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고난 받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던 우리 주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더욱 하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성으로 인한 썩어져 가는 세상의 욕심을,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스러운 하늘의 기업을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시선을 고정시키고, 거기서 오는 그 놀라운 생명과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18세기 청교도로서 미국 Native Indians 평신도 선교사로 살던 David Brainerd 는 늘 일기를 써왔는데, 그 일기를 모아 놓은 책 가운데 1747년 5월 17일 일기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내 속에는 죄와 부패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죄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영적이고 거룩한 삶은 결핍되어 있었고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게으름만 무성하였다. 그런데 아침에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이제껏 내가 느껴보지 못한 황홀하고 아름다운 것이 뇌리를 스쳐갔다.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완전함 중에 거하는 신령한 세계를 더욱 갈망하기 시작했다. 영혼의 최고의 행복은 모든 힘을 다하고 능력을 다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온전히 그 분을 위해 사는 것이다. 나 자신의 행복보다는 하나님을 즐거워해야지.’
오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며 성찬식을 참여하면서도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렸다면, 죄를 회개하고 지금도 변함없이 흐르는 십자가의 보혈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씻어 새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각오를 하며 이 전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조금이라도 달라진 모습이,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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