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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2-08-04 (목) 05:24
분 류 수요설교
ㆍ조회: 430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더라도 참아라 (벧전 2:18-25)
앞 문맥(2:1-17) 에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이 있더라도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에 하나님이 허락한 이 세상의 권세자(왕)들에게 순복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삶 가운데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상전들, 상사들에게 순복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18절)고 합니다. 여기 “사환들(slaves)”은 집안에서 일하는 노예들을 가리킵니다. 1세기 초대교회 당시 노예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교육도 받았기에 의사, 교사, 요리사, 예술가, 비서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아래 인구들 중 25-40% 정도가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예 중 대부분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명령합니다. 그들의 주인들에게 순복, 순종하라고 합니다.
어떤 자세로 순복해야 합니까?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하라고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이 주인을 허락하셨다고 믿고 그 권위에 자발적으로, 주인을 공경하는 자세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순종하는 동기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을 위한 일인 것처럼 여기고 성실히 감당한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선한 행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선하고(good) 관용하는(considerate, reasonable)” 즉 착하고, 종들을 배려하며 상식적인 자들이라면 당연히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 주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까다로운(skolio/j, harsh or unreasonable)” 즉 몰상식한 주인일 경우입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육체적으로 학대하거나, 마음이 삐뚤어지고 부정직한 이런 주인들을 공경하며 순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물론 당시 사회에서 노예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기에, 몰상식하게 대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조차 순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하는 불의, 억울함보다 더 큰 이슈는 그 때의 행실에 예수님의 이름이 걸려 있으며, 그런 악한 주인도 종의 선한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선한 행실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하나님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19-20절)고 하였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자신은 잘못이 없는데 주인이 고통을 주는 경우를 말합니다. 억울하고 분하겠지요. 그런데 죄가 있어서 매를 맞는 경우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잘못을 범하여 매를 맞으면서 참는 것이 무슨 칭찬을 받을 일입니까? 그러나 잘못이 없는데도 매를 맞으며 고난을 당할 때 참는 것이 선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며 함께 하심을 깨달으며 참고 견디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며, 인정(칭찬)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행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고통을 이길 힘을 주시며, 계속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며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은혜와 긍휼을 베푸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6)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절 이하에 예수님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라는 의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절)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실 뿐 아니라,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을 견디도록 부르시기도 하셨다. 예수님이 그런 고난을 당하신 것이 우리들의 본이 됩니다. 물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나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견디신 것과 같은 모습으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22절)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사야 53장 7-9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부당한 고난을 당하실 때 죄를 짓지 않으셨다고, 입으로도 죄를 짓지 않으신 것을 언급합니다. 체포당하시고 여러 차례 심문을 받으시며, 십자가 처형 등에 대해 얼마든지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어도 그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공격을 당할 때 우리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말로서 라도 변호하거나 때로 더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도 할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모욕을 당하거나 하면 복수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보이신 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로도, 능력으로도 복수하지 않으시고 잘 견디며 버티셨습니다. 오직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에게만 부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런 확신으로 모든 상황을 하나님에게 맡기며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죄 사함과 치유,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24절)! 십자가의 죽으심은 부당한 고난에 대한 본을 보이심 이상으로 놀라운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바로 우리 믿는 자들의 죄 용서함, 영적치유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 6:10-11)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에 대하여 삶으로 말 뿐 아니라 행실로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산상수훈 설교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고 하였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터에서 개인적으로 상사나 고용주의 부당하고 몰상식한 대우로 고통을 당할 때 주님의 본을 따라 말로나 행실로 죄를 짓지 않고 잘 견디며 주님에게 하듯 그들에게 순복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하는, 주님의 이름을 걸고 사는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야 합니다.
당시 디아스포라 교인들도 믿기 전에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길 잃은 양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25절)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길 잃은 양처럼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주님의 본을 따라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감독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돌보시며 인도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고 관용을 베푸는 상전들에게만 아니라 몰상식하고 악한 상전들에게도 순복하며, 주께 하듯 성실히 일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칭찬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2-24) 하였습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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