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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3-11-26 (일) 03:53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221    
진리의 말씀을 굳게 잡아 거룩하라 (계 2:18-29)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있듯이 사람의 속 마음은 아무도 잘 모르는 모양입니다. 겉은 참으로 번듯하여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속 마음을 들여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속고 지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속이고 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눈을 피할 수 없지요.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더더욱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 원어에서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믿는 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는 구별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생각과 사고방식이 다르고, 마음가짐이 다르고, 행동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라보며 따르는 주님을 닮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 가운데서 겉으로 나타난 행실은 좋은 것들이 많았으나 거룩하게 살지 못하여 책망을 듣는 교회가 바로 오늘 본문의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일곱 도시 가운데 가장 작은 도시에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편지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 가장 긴 것을 유의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지도] 두아디라는 지난번에 살펴본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곳으로 버가모와 사데의 중간에 있던 도시로서 경공업이 성행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구리(주석) 산업이 왕성했고, 모직이나 견직 공장들이 있었고, 염색 산업이 발달하여 이런 교역이 왕성했던 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을 공경하던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로 이 두아디라 출신이었습니다. 그녀는 빌립보로 이주하여 거기서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중생을 체험하며 함께 빌립보교회를 개척하며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이 여인으로 인하여 두아디라 교회가 개척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많은 교역 조합(trade guild)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그런 모임들이 여러 불신앙적인 규례를 정하여 공동식사, 공동숭배, 신전헌납 등을 강요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멀리하고, 그들과 어울리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도시들처럼 유명한 우상 신들을 섬기던 신전은 많이 없으나, 아폴로 신을 섬기던 신전은 있었습니다.
이런 도시에 자리잡고 있던 두아디라 교회에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Slide 1-1] 우선 저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칭찬을 하십니다.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하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의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19절)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한 사업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 하는 일이 모두 선한 동기에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사랑과 믿음의 동기로 교회를 섬기며 인내하였던 일들입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교회였고, 가만히 있으면 견디지 못하는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보다 나중에 한 일이 더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사랑과 믿음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Slide 1-2]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겉으로 일을 많이 하여도 교회 안에 죄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음란의 죄, 신앙양심을 더럽힌 죄를 용납하며 함께 어울려 죄를 짓는 자들이 많아지고, 죄를 지으면서 그런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죄입니까? 음란의 죄와 우상 제물을 마음대로 먹게 하여 양심을 더럽힌 죄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20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은 ‘이세벨’이라고 불리는 이 여자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금방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을 보시고 대단히 놀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 여자를 용납하면서, 주의 종들을 가르치게 했다는 자체가 교회가 성경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딤전 2:12)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단은 여자 목사나 장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자가 자녀를 가르칠 수 있기에 유년주일학교, 중고등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을 가르치거나 주관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선교지에서 성경을 가르칠 남자가 전혀 없을 경우에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드보라 선지자 때처럼 남자들이 제 구실을 못할 때 말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남자가 있는데 여자가 나서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사실 50여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기독교계에 어느  교단이든지 여자 목사나 장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와 여성해방운동(feminist movement) 등이 교회로 침투해 들어오면서 성경을 그들 취향대로 해석하며 생겨난 것입니다. 그 전까지 신실하고 똑똑한 여성들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로 지어진 창조질서의 원리를 따라 산 것입니다.
사실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이라고 지적을 받은 거짓 선지자는 실제 이름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름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왕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주 악했던 아합 왕의 부인이 이방여인 이세벨이었는데,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에게 경배하도록 하고, 바알 신을 섬기는 이들의 행위에 따라 혼음을 하며, 우상 음식을 먹게 함으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게 했던 것입니다(왕상 16:29 이하; 왕하 9:30 이하). 이처럼 두아디라 교회에 어떤 여인이 나타나 자신 스스로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인들을 가르쳐 행음을 하게 하고 우상제물을 마음대로 먹는 죄를 짓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이 여인이 그렇게 가르쳤다고 해서 넘어간 교인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회가 아주 음란하였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적인 타락의 죄를 지적했습니다(롬 1:24-27).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기 싫어하고, 만족하지 못하고 부부의 성관계를 떠난 동성애나 추하고 더러운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두아디라 교회 교인들 중에는 예수를 믿기 전에 음란한 생활을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또 개인적으로 늘 그런 유혹에 노출되어 살고 있었기에 조금만 유혹이 오더라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문제는 교회 안에는 이런 음란한 생활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런 비정상적인 성관계, 무질서하고 무절제한 성관계를 죄로 규정하고, 비록 믿기 전에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일단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더 이상 그런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만약 그런 자들 있다면 회개하여 돌아서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권징을 했어야 했습니다.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아무리 추하고 더러운 성문화가 대세를 이루며 활개를 칠지 몰라도 교회 안에는 이런 것이 들어올 수도 없고, 들어와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는 이 순결의 벽이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이 벽을 무너뜨린 장본인이 바로 주님께서 이세벨이라고 칭한 거짓 여선지자였습니다. 아마도 대단히 예쁘고 매력적인, 말도 잘하는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 남자들 중에 이 여자를 보고, 또 그녀의 말을 듣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앞에 나온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실 때에도 발람의 교훈을 듣고 행음하는 자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주님께서 스스로 잘라내겠다고 하셨는데, 발람과 이세벨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발람은 속이기만 했지, 이세벨처럼 사람의 인격까지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즉 사람을 완전히 홀리게 하여 이 여자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도 발람의 영향은 일시적이었지만, 이세벨의 영향은 계속되어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나라가 최종적으로 망할 때까지 미쳤던 것입니다. 즉 가칭 이세벨은 나라까지 망하게 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거짓 선지자인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인격적으로 육체까지 지배하여 완전히 망할 때까지 악영향을 미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던 주의 종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신앙의 순결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더럽고 추한 죄에 빠질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즉 어느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았어도 우리 안에 아직 죄성이 있고, 정욕이 살아있어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잘못보다 성적인 범죄는 치명적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쳤던 요셉처럼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피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유혹의 상황이 주어지면 넘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평소에 경건의 훈련을 하지 않고 깨어 있지 않으면,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Slide 1-3] 그런데, 이런 치명적인 죄에 빠진 교인들의 더 큰 죄는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데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계속 죄 가운데 부도덕하게 삽니다. 돌이키지 않습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21절)라고 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결과는 엄청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심판의 주로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18절)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통찰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23절)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사람의 속내를, 숨은 비행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또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마치 주석(bronze) 같은 발로 밟는 것이니 그 발에 밟히면 뼈가 다 가루처럼 으스러지고 말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지고 거짓 선지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을 짤라 내고 나머지는 다시 살리겠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난 심판의 주님의 모습은 훨씬 무섭습니다. 어떤 심판입니까?
[Slide 2-1] 첫째는, 못 고칠 질병으로 인한 심한 고통의 심판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22절)라고 하셨는데, 여기 “침상”의 원어의 뜻은 병상을 뜻합니다(고전 11:30). 즉 그런 음행을 하는 자들이 못 고칠 병에 걸려 눕는 것을 말합니다. [Slide 2-2] 둘째는, 큰 환난을 당하게 합니다. 계속해서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22절) 하였습니다. 정확히 어떤 큰 환난을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마지막 7년 대환난일 수도 있고, 그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심한 고난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입니다. [Slide 2-3] 셋째는, 그 자녀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23절)라고 하셨습니다. 이세벨의 영향을 받은 자녀들을 죽이십니다. 그런 불경건한 삶을 바라본 자녀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거짓 선지자에게, 사탄 마귀에게 속은 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적인 죄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훌륭한 아내나 남편, 자식, 좋은 교우 관계, 좋았던 추억들, 귀한 사역들조차 다 잃어버리고 비참한 끝을 맞습니다. 그러니 이세벨에게 속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고 계속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낱낱이 그 행위를 다 아시고 그대로 갚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23절하)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심판하십니다. 모든 교회가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공개적인 심판입니다.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아직도 죄 가운데 거하며, 내 마음대로 사십니까? 회개하십시오. 기회가 주어질 때 돌아서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감사한 것은 사탄의 유혹과 공격에도 패하지 않은, 이세벨의 깊은 교훈을 받지 않은 두아디라 교회의 몇 몇 교인들이 있었습니다(24절). 그들에게는 지울 짐이 없다고 하십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5절)고 하십니다. 악한 영향을 받지 않고 가지고 있는 진리의 말씀을 굳게 잡고 더욱 거룩한 삶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좀 연약하고 부족하더라도 우리에게 있는 것을 굳게 붙잡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얼마든지 구별된 거룩한 삶을 계속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옛적부터 내려오는 정통적인 신앙, 청교도의 신앙으로 말씀만 굳게 붙들고 지키며 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많이 몰라도 그것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주님께 칭찬 들으며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과 함께 이 세상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셔서 심판을 하고, 새벽 별의 상급을 받으며, 존귀한 새벽 별처럼 부활의 기쁨 속에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된다고 합니다(26-28절). 이 새벽 별은 우리 주님 자신을 가리킵니다(계 22:16).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요약- Slide 1 & 2]
우리 성도들은, 교회는 당연히 거룩해야 합니다. 이 세상과는 다른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 . .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함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데살전 4:3,7)라고 하였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레 11:44인용) 하였습니다. 반대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살지 못하도록 유혹을 하며 공격을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성적인 죄를 짓지 않거나 우상 숭배하지 않는 것만이 거룩한 삶입니까? 사람들이 보기에 별로 크게 죄가 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는 죄가 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깨어 있어서 어떤 죄에도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만, 거짓, 시기 질투, 싸움, 파당 만드는 것, 적당하게 위기만 벗어나려는 처세술, 임기응변 등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잘못된 가르침, 성경 말씀과 어긋난 가르침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적인 모든 가치관을 버리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의 감동과 감화를 받으면, 그리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거룩하게 됩니다. 진실로 믿는 여러분들은 이미 거룩한 하나님 나라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지속적으로 진리의 빛 가운데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시면, 말씀을 굳게 붙들고 기도하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게으르면 유혹에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부디 신앙생활에 부지런 하십시오. 정결한 주님의 신부로서 거룩에로 헌신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있는 진리를 굳게 붙잡고 계속 거룩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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