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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12-05-28 (월) 08:27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64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하고 나서 의기소침할 때에 그 사람이 잘못을 깨닫고 있다고 생각이 되면 그냥 놔두거나 오히려 사랑으로 품어주면 그 사람은 감동을 받고 변화하게 됩니다. 사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그 때 가장 가슴 아픈 사람은 그 당사자 본인인데, 그 아픔 위에 또 다시 못질을 하면서 더 아프게 하면 그 사람을 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부어주면 그 사람은 힘을 내고 아픔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일어서야 할 것인지 알게 됩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하던 제자들이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고 준비한 아침 식사를 함께 한 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셔서 나누신 대화의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려도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십자가 사건 며칠 전에 확언을 하였던 베드로였습니다(마 26:33,35).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외쳤던 베드로였습니다(요 13:37).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체포되고 나니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까지 지냈던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으니 기뻐해야 할텐데,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죄책감으로 인하여 의기소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일대일로 만나주시면서 대화를 나누십니다. 왜 그랬느냐고 야단을 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라고 물으십니다. 우선 베드로에게 베드로라 부르지 않으시고 시몬이라는 옛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믿고 따르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을 한 후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새로 붙여주신 이름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를 시몬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베드로라고 불렀다면 그 유명한 고백에 걸맞게 살지 못한 자신을 얼마나 더 비참하게 느꼈을까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해 주려고 시몬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아’라고 부르신 후에 그의 잘못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아픈 곳을 찌르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아픈 곳, 상처를 찌르지 않는 것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잘못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다시 들먹이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주위에 충고한다면서 자꾸 남의 아픈 상처를 들추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시몬아’라고 부르신 후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 속에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는 뜻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즉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아시면서 물으셨습니다. 이유는 사랑의 고백을 주고 받음으로써 그를 회복시키시기 원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네 종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다 사랑이지만 헬라어 원어에 의하면 그 뜻이 조금씩 다른 사랑 네 가지가 나옵니다. 남녀간의 로맨틱한 사랑인 에로스(eros), 부모와 자식간의 본능적인 사랑인 스톨게(storge), 친구와의 우정인 필레오(phileo),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agape)가 있습니다. 다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차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에서 물으실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에는 아가페 사랑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에서는 필레오 사랑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은 아가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었으니까요. 인간적인 열정(affection)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니까요.
   두 번째 질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셨습니다(16절). 베드로는 여전히 필레오 사랑으로 똑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눈높이로 낮추셔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필레오)하느냐”(17절)고 바꾸셔서 물으십니다. 이 말씀에 그만 베드로는 근심했다고 합니다. 세 번씩이나 물으셔서 자신의 말을 의심해서 그런가 근심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원어에 의하면 자신의 과거의 삶이 필레오 사랑으로 주님 사랑하는 모습도 나타내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물으신 줄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또 다시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서 적어도 이 필레오의 사랑이라도 확인하기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이 확인되면 베드로는 회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실패한 것이 이 사랑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주님을 향한 이 사랑이라도 확실하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의 특징은 동행입니다. 하나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사랑하는 사람이 기쁘면 나도 기쁜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이 울면 나도 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항상 동행하는 것이요, 하나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체포되어 십자가 사형에 처해진다고 했을 때 자기는 살겠다고 도망가버렸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혈기로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님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베드로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에게는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네가 나를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니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속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사랑, 주님 사랑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의 가장 기본이 되는 표지(primary mark)가 하나님 사랑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핵심이 쉐마에서도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고 하였습니다. 다니엘도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단 9:4)라고 기도하였으며, 느헤미야도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수많은 다윗의 시편의 주제도 하나님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신약성경에도 참된 성도의 표지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가장 큰 계명을 묻는 서기관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친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라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고전 8:3)고 하였으며,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고 경고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고 하였으며, 사도 베드로도 훗날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 사랑을 확인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사랑이 확실하면 모든 것을 다 이룹니다. 사랑이 있으면 힘이 생기고 지혜가 생깁니다.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이 없습니다. 사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께서 사랑의 마음으로 하시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큰 일꾼이 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왕이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물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들은 후에 세 번씩이나 무슨 말씀을 반복하십니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귀하게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주님의 양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어린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형제와 자매들이 다 주님의 어린 양들입니다. 이 주님의 양들을 먹이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돌봄을 받지 않겠다면, 사랑을 받지 않겠다면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실패하고 낙담해 있는, 죄책감에 의기소침해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 사랑을 확인한 후에 또 다른 어린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자기와 비슷하게 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낙담해 있는, 죄책감에 의기소침해 있는 양들, 상처 받은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즉 연약해서 넘어졌던 베드로에게 또 다른 연약한 자들을 돌보게 하셨고 상처를 입어서 넘어졌던 베드로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었던 자들을 부탁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회복시키신 후에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어린 양들을 베드로에게만 맡기시고 아주 손을 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도 영으로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며, 베드로를 만났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만나셔서 위로하시며 상처를 싸매시며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누군가가 그런 주님의 손길을 대신해서 그들을 보살펴 주어야 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일에 가장 허물이 많았고 가장 상처가 많았던 베드로를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가 넘어져 보았고, 실패해 보았기 때문에 다른 넘어진 자들과 실패한 자들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다른 넘어진 자들과 약한 자들을 돌보아주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약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믿기 전에는 강한 자인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도움이,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모두 잘 알아서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우리 모두는 어린 양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얼마나 잘 넘어질 수 있고, 얼마나 자주 실패할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이런 약한 어린 양들이 최고로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3년간 공생애 사역을 살펴보면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로 누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까?
   베드로가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회복이 되었을 때 이 약한 자들을 먹이고 지키고 돌보는 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가 실패했던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다고 주님보다 양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어린 양들을 돌보고 사랑한다 하더라도 주님보다는 더 사랑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유는 주님보다 양들을 더 사랑하면 실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자세하게 알게 되면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덜 사랑하게 되고 그 뒤에는 아예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양들에게 좋은 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돌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인물이 좋고, 교양과 학식이 있고, 재물이 많기 때문에 돌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피를 흘리시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아무 사랑할 이유를 찾지 못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의 양들이지 내 양들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주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아가페 사랑으로 말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고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던 것처럼, 연약한 우리 모두에게 이미 찾아오셨습니다. 엄청난 사랑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세 번씩 반복하면서, 과거에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입었던 깊은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습니다. 치유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한 후 완전히 회복이 되었습니다.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은 사람을 치유하고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어린 양들을 먹이고, 치며, 돌보면서 남은 일생을 살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부터 12장까지는 사도 베드로의 이 사역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전후서를 읽어보십시오.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던 고백대로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주님께서 다 아시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진실로 주님 사랑한다는 고백이 여러분의 입술에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이 전보다 더욱 사랑하기 원한다는 간구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에, 우리 주위에 있는 주님의 어린 양들을 사랑하며 돌보는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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