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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태일 목사
작성일 2020-06-28 (일) 10:20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812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눅 9:28-36)


여러분은 혹시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해 본 적이 있나요? 아주 신비하고도 황홀한 경험 말입니다. 만약 있었다면 그 후에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신 후에, 앞으로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다시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26절). 그리고는 일주일쯤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시러 어느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28절).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와 마가는 6일 후라고 하였는데(마 17:1; 막 9:2), 재림의 약속의 말씀을 하신 날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날 사이가 6일이라는 말이며, 오늘 본문의 누가는 그 날들을 포함하여 8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 일주일 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러 올라간 산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화산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나인 성에서 가까우 다볼 산(Mount of Tabor)으로 생각하는데 불확실합니다.
그런데 인상 깊은 것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실 때에 변화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주님과 아주 가까이 지내던 세 제자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처럼 말입니다. 앞으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을 잠깐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문 29절에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는 보다 구체적으로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고 하였습니다. 여기 변형되었다는 원어의 뜻은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transfigure, transform). 수동형으로 되어 있으니 변화를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바뀌었는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얼굴이 해 같이 빛이 났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하였습니다. 30여년 동안 육신의 모습 만으로 사셨는데, 지금 세 제자 앞에 신적인 영광으로 변화하신 모습입니다. 그 동안은 지상사역의 삶 속에서 하신 말씀과 베푸신 기적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계시하셨는데, 지금은 직접 그 변형되신 영광의 모습으로 초자연적인 증거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빛은 예수님의 영광과 위엄을 실제적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의 한 증인인 사도 요한은 훗날 증거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30-31절에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구약의 성도들의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확인합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자요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며 말세의 징조로 하나님께서 보낼 선지자입니다(참고- 말 4:5; 눅 9:19).
한번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신”(눅 24:27)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서, 선지서 등 구약성경은 모두 예수님에 관한 계시라는 말씀입니다. 또 그들이 영광의 주님과 함께 나타난 것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31절) 라고 함으로, 이제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르셔서 희생제물로 돌아가실 것을 두 사람이 확인한 것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야는, 모든 구약의 성도를 대표하는 그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할 뿐 아니라,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십자가 구속사역’까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죄인들을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신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아마 세 제자들은 좀 기도하다가 잠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32절).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가장 위대한 계시의 순간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들이 깨어나 영광의 예수님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보았으나, 그 두 사람이 떠나려고 하니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절)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때가 이제 곧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기 6개월쯤 전으로 장막절(초막절, 수장절) 절기 때로 여겨집니다. 보리 추수를 끝내고 이제 막 밀 추수가 시작되는 유대 3대 명절 중 하나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40년 동안 장막 생활을 할 동안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을 기억하여 희생제사를 드리며 곳곳에 장막(초막)을 지어 7일 동안을 지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일주일 전에 예수님께서 이제 곧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 9:22)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산에 예수님이 영광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여 주시고, 거기다가 존경하는 영웅들인 모세와 엘리야까지 보았으니, 여기에 초막을 짓고 함께 살지,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좋은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것입니다. 아직도 베드로는 자신의 관점에서 주를 믿고 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잘못이라기 보다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마음 한 구석에는 ‘예수님이 죽지 않겠지, 뭐 때문에 일부러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며 또 다시 오시겠느냐’ 라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또 하나 베드로의 어리석음은 예수님을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위치에 놓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세나 엘리야의 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산에 세 신앙의 영웅들을 동일시 하여 각각을 위해 성막을 지어 이 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할 때에 모세와 엘리야는 이미 사라지고 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은, 역할은 일시적이며 이제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마쳤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금방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역은 단지 율법과 선지서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영광의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살아있는 말씀,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과 선지서를 주신 분일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완전한 성취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베드로가 자기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했다(33절하)고 적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헌신은 그런 신성한 장소에 대한 헌신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십자가에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35절하). 할렐루야!

베드로가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할 때에 갑자기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 것이었습니다(34절). 구름 속으로 자신들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두려워할 때에,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35절)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실 때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출 13:21; 민 9:17; 신 1:33).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에 구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구름이 세 제자들을 덮으며 직접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으며, 마태와 마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 막 9:7)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에도 동일한 음성이 들렸습니다(마 3:1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양자의 영, 성령을 받아 양자가 되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친 아들로서 성육신하여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고 따랐기에 ‘이는 내 아들이요 택함을 받은 자로서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직접 세 제자에게 ‘저(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 아들이 너희들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여야 한다면 그를 믿어라. 또 그가 죽은 후에 사흘 만에 부활한다고 하였으면 그대로 믿어라. 그가 네게 네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면 그대로 해라. 그가 영광 중에 다시 올 것이라고 하면 그대로 믿고 그렇게 살아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던 베드로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마 그 생각이 싹 사라졌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과 좋은 교제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두려워 하나님을 피해 숨었고, 그 관계가 깨어졌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가 깨져 있었습니다. 단절된 상태,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만약 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면 두려워하며 공포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믿음으로 그 관계가 회복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버릇없이 대하면 안되겠지요. 주님의 은혜와 위엄, 그 사랑과 공의, 친구가 되심과 아울러 주(Lord)가 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광의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36절)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 17:9)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참, 이런 엄청난 영광의 비전을 보았는데, 하늘나라의 맛을 보았는데 어찌 제자들이 가만히 자기들만 알고 있겠습니까? 우리 같아도 얼른 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메시아, 다른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사건이었기에 그렇게 지시하셨다고 여겨집니다. 정복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오셨고, 영광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고, 정치적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죄로부터의 사슬을 풀어주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를 정복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기 위하여 오신 주님이셨습니다. 아 멘!

사랑하는 가든교회 교우 여러분!
이 변화산 사건 이후 약 30여년이 지난 후에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고 하였고, 이어서 19절에 “또 우리에게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변화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것이 베드로의 가르침에 탁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핍박 중에 신앙생활하던 디아스포라 교인들에게 쓴 베드로전서, 후서의 메시지를 요약한다면, ‘성도들이여, 지금 당하는 고통과 환란, 시련과 핍박 등을 염려하지 말아라. 영광의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신다’ 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만약 그 때 그 상황에 있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요? 눈부신 광채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주님을 대하셨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서론에 언급한대로 그 때 그 모습은 아마 앞으로 주께서 재림하실 때의 모습의 예고편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만약 지금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렵니까? 세 제자들처럼 그 때도 내 생각으로 말하거나, 아니면 두렵고 떨림으로 땅 바닥에 엎드려져서 고개도 못 들고 심판을 기다리겠습니까?
아니 그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명하십니다. “저의 말을 들으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고난 받으신 이유, 십자가에 피와 물을 다 쏟으시면서 죽으신 이유, 아니 사흘 만에 살아나신 이유,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시고 다시 오겠다고 하신 이유를 아십니까? 확실히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며, 영광의 왕임을 확신하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세 제자들의 변화산에서의 체험도 큰 것이지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 성경 66권이 있으니 재림하시기 전까지 주의하여 들으라,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신비한 영광스러운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에게 주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면할 시간을 소망하며 오늘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십시오. 그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지금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는 분들이라면 그렇겠지요. 그러나 지금 너무 좋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별로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베드로처럼 ‘여기가 좋사오니’ 입니까? 비교가 되지 않는 하늘나라의 영광입니다. 이 세상의 잠시 잠깐의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과 함께 하는 영원한 시간입니다. 내일이 그 시간이라면 오늘 이렇게 사시겠습니까?

또한, 예수님도 기도하실 때에 변화를 체험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복종하면 우리를 영광의 몸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살아계신 성령을 체험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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