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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 태일 목사
작성일 2011-02-01 (화) 10:14
분 류 주일설교
ㆍ조회: 1744    
용서를 받았으면
우리 주위에는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죄를 짓는데, 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느냐는 논리가 먹혀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 정도의 죄는 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짓는 죄인데’ 하면서, 그저 죄 짓고 나서 자백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자백하면 된다는 식으로 자신에게 편하게 생각하면서 교회를 다닙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해도 될까요?
   지난 주일에 살펴본 7장 후반부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하속들을 보냈지만, 때가 아직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하속들은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잡기는커녕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도 미혹이 된 줄 알았습니다(7:46-47). 그러자 음흉한 음모를 꾸며서 예수님에게 나아옵니다. 바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들린 여자를 끌고 와서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4-5절)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예수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6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을 고소해서 죽이기 위하여 꾸민 음모였습니다. 왜냐하면 수상한 데가 많은 질문입니다. 간음한 여자를 재판할 것이면 그냥 산헤드린 공의회에 여자를 데려가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간음한 현장에서 잡혔으면 남자도 끌고 왔어야 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간음했으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레 20:10, 신 22:22-24). 그런데 여자만 끌고 왔습니다. 어쩌면 그 간음했던 남자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매수한 하수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노렸습니까? 예수님의 딜레마는 무엇이었습니까?
   만약 율법대로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면 그 동안 쌓아온 예수님의 명성에 크게 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약한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의 친구였습니다. 세리와 창녀와 함께 식사하신 분이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하고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로마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나라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돌로 치라고 했더라면 로마 당국에 고소할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돌로 치지 말라고 했으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어긴 예수님을 당장 체포하여 산헤드린 공의회에 넘겼을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마귀는 우리에게 정면으로 공격을 해 오다가 그것이 잘 안되면 궤계(schemes)를 사용합니다. 이런 음흉한 음모를 꾸며서 진퇴양난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며 살다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다 지키며 살 수 없는 연약함을 알고 죄인임을 깨닫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 구원 받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율법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너무나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하지 않고 죽이는 데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예수를 잘 믿는다고, 대단한 사람인양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 옆에 그 사람 때문에 예수님께로 인도되어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불쌍한 죄인들을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을 삼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건져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멘!

   흉악한 이리 같은 저들의 음모에 빠진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그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그들의 질문에 아무 답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6절하). 무엇을 쓰셨는지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기에 모릅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땅에 썼다는 헬라어 원어의 동사에 대항하다는 의미기 포함되어 있기에 성경학자들 나름대로 여러 해석을 하면서 저들의 음모에 대항하여 무엇인가를 썼다고 추측하는데, 초대교부들은 아마도 예수님은 죄의 목록을 쓰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그들은 땅에 쓰신 글에 대하여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계속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셨습니다(8절). 드디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처음 땅에 글을 썼을 때에는 아무도 안 가더니 두 번째 글을 쓰니까 한 사람씩 다 돌아가는데 어른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갔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두 번째 쓰신 글에는 거기 모인 사람들의 죄를 하나씩 다 지적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죄 없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간음한 여자만 죄인이 아니라 다 똑같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할 때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소리를 듣는 순종하는 교인들의 손에는 서로를 향해 던지기 위한 돌이 들려 있지 않습니다. 손에서 돌을 놓고 모두가 서로 용서하고 감싸주고 위해 줍니다. 계속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께서 양심을 찔러 주시기에 잘못이 있으면 내가 잘못이고 돌을 맞을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내가 다른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이 모이는 교회가 참 은혜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모든 사람이 도망치듯이 다 사라지자 간음한 여자만 혼자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절)! 죄를 미워하시더라도 죄인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여자여”! 이는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에게,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부르던 호칭입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께서는 이 죽을 처지에 놓인 여자를 긍휼히 여기시면서 부드럽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여자가 아무도 없다고 대답하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11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결코 예수님께서 죄를 가볍게 다루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얼마나 관대히 대하고 계시나, 얼마나 부드럽게 여자를 위로하시며 용서하시는가 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죄를 책망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요, 죄를 회개하라고 소리지르는 것도 아니라 용서하는 데에 있다. 묻지 말고 용서해라, 덮어두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합니다. 맞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반쪽만 알고 있는 것으로서 오히려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여자여, 네가 범한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너와 같은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를 대신해서 돌아 맞을 것이다. 내가 너를 대신해서 죽도록 하마. 그러니 너는 안심하라.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너를 용서하신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자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십자가에 대신 죽으실 그 은혜와 공로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나중에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며 숨을 거두실 때에야 깨달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용서 받는 편에서는 너무나 쉽게, 정말 상상도 못할 방법으로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편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절한 고난을 거쳐야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수난과 생명을 담보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쉽게 용서하는 것이며, 쉽게 죄를 다루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사실을 늘 마음에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회개하라고만 하십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피로 다 씻어주고 덮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쉽게 용서 받는 것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자기의 아들을 희생시키면서 하는 용서입니다. 쉽고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죄가 그냥 용서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너무 미워하시고 싫어하십니다. 크게 진노하십니다.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뼈를 깎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어떻게 쉬운 용서입니까? 어떻게 죄를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Forgiveness does not imply license to sin!

   그래서 이 여자를 보내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하)! 이 말은 가서 죄 짓는 생활을 계속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적어도 간음죄만큼은 다시는 범하면 안 된다는 경고입니다. 물론 그녀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저는 너무나 자주 보아왔습니다. 아무리 죽었다가 살려놓아도 다시 과거의 죄된 모습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죽었던 목숨이 예수님 때문에 다시 살아났다는 은혜를 생각한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그 은혜가 이 여자를 사로잡아 주야로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그녀를 사로잡으면 죄짓는 생활을 계속하지 못합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의 감격을 누린 자는 이전처럼 죄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아픔이 크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회개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성경은 회개를 “토설”한다고 말합니다(시 32:3). 괴롭게 구토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들은 죄가 지긋지긋합니다. 그 고통이 두려워서 죄 근처에도 못 갑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회개가 없는 사람은 입술로 고백하고 또 범죄하고 입술로 고백하고 또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그 사람을 망하게 합니다. 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가 우리 영혼을 망하게 하고, 우리 가정을 망하게 하고, 우리 교회를 망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 죄는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굴레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지 마시고, 철저히 회개하시고, 다시는 죄악의 길로 가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날마다 묵상하며 사는 사람들은 죄를 이기고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 죄를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경향가든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알고 계십니까? 또한 하나님의 사랑, 그 자비와 긍휼을 바로 알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 양심에 찔림을 받고 그 자리를 떠나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양심에 찔림만 받는다고 해서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이 되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양심에 찔림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후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간음한 여자를 용서해 주시지만 죄의 길에서 실제로 돌아서라고 예수님께서 용서하신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생명을 버렸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우리도 죄를 미워해야 합니다. 죄의 배후세력인 악한 마귀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히 12:4-6)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 정말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시고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진정으로 죄 용서를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용서 받는 사람처럼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악한 마귀가 시험할 때마다 약해질 때마다 용서 받은 사람처럼, 우리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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